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화제작 ‘더 프롬’에 유일한 동양인 캐스트로 참가한 한국인이 있다. 배우 황주민이다. 국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가 어떻게 브로드웨이 무대에 설 수 있었을까? 그는 흔히 미국 교포나 미국국적자도 아니다. 그저 29세의 나이에 홀홀단신 미국으로 떠난 ‘늦깍이 유학생’이었다.

황주민은 10개월 공연 대장정을 마치고 5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그의 ‘늦었으나 값진 도전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배우의 꿈, 실패 연속이었던 나날

어린 황주민은 14살 때 이미 춤꾼으로 유명했다. 평범한 삶을 원했던 부모님은 늘 반대했지만 학창시절 내내 1세대 비보이로 활동하며 춤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고2 때, JTL 장우혁의 개인 댄스팀 ‘뉴웨스트’에 뽑히기도 했다.

“신이 나서 부모님께 계약서를 들고 갔는데 눈앞에서 찢더라고요. ‘공부하라’는 거였죠. 그러면서 ‘인서울 대학만 들어가면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어요. ‘그래, 평생 싸우는 것보다 1년 투자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 춤추듯 공부해보자’ 결심했어요. 비행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세종대 항공우주공학과에 입학했죠.”

부모님의 뜻에 따라 대학을 입학한 후 본격적으로 무대에 섰다. ‘사랑하면 춤을 춰라’ ‘브레이크 아웃’ 등 무대를 이어가다가 런던 공연의 기회를 잡았다. 그에게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 계기였다.

“런던에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공연을 봤어요. ‘일렉트릭시티’ 곡에 맞춰 빌리가 공중을 날면서 춤추고 연기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춤이 아닌 다른 걸 해보고 싶다’고 처음 느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는 평소 노래를 즐기지도 않았던 ‘노래 생초보’였다. 보컬 강사 열 명을 찾아갔으나 2명만이 수업을 허락했다. 두 명 중 한 선생님은 중도 포기를 했고 나머지 한 선생님이 그를 붙잡고 3년을 가르쳤다.

“다시 성악으로 대학에 들어고 싶었지만 번번히 실패했어요. 그러다 명지대 예술종합원 콘서바토리 성악 과정이 있다는 걸 알고 그곳에서 공부를 이어갔어요. 그리고 뮤지컬 오디션에 도전했지만 계속 떨어졌죠. 작은 키에서 평범한 외모라는 이유였어요. 제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영역 때문에 떨어지니 방법이 없더라구요.”

그의 지도를 맡았던 장숙희 교수는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 학교로 가서 브로드웨이를 경험하라’는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국내 뮤지컬 몇 작품 서본 제가 그곳에 간다고 별 수가 생기는 건 아니었죠. 게다가 그때는 영어도 잘 못했거든요. 더 큰 무대를 보고 배운다는 생각으로 가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는 홀홀단신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내 발자취, 누군가에겐 희망

유학생 신분이었던 황주민은 대학 졸업 후 예술인 비자인 ‘O1’을 얻기 위한 기간, 1년이 주어졌다. 어떤 방법으로든 경력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첫 6개월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디션 200건에 떨어지면 후련한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오디션을 찾아다녔다. 그는 그렇게 남은 6개월간 300건에 달하는 오디션을 봤다.

“배우 조합에 가입되지 않는 사람은 정식 오디션을 볼 수 없어요. 아침 일찍 선착순으로 가서 대기표에 이름을 올려야 해요. 정식 오디션이 끝나고 비공식 대기자 몇 명에게 기회가 주어지죠. 자신의 얼굴 사진과 이력서를 들고 눈을 반짝이며 아침부터 쭉 줄을 서요. 힘든 나날이었지만 모든 것이 영화같았어요. 그때는 뉴욕 빌딩들이 왜 그렇게 높아보였는지요.”

황주민은 10개의 작품에 합격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전하다보니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신세계 문명의 충돌’이라는 단편 영화 주연부터 넷플릭스 영화 ‘어쩌다 로맨스’ 단역, 마블 드라마 시리즈 ‘아이언피스트’ 시즌2 episode9에 ‘해치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어요. 아! 그리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엘리베이터를 타면 ‘감사합니다’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나와요. 한국어를 제가 녹음했어요. 하하.”

오프브로드웨어 ‘그린카드’ ‘K팝’에 출연한 후 드디어 그는 브로드웨이 첫 무대 ‘더 프롬’에 앙상블 조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더 프롬’은 보수적 지역인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레즈비언 고교생 두 명이 겪는 고뇌와 갈등, 화해를 다룬 유쾌한 코미디물이다.

‘더 프롬’의 인기로 황주민은 굵직한 여러 무대도 경험할 수 있었다. 작품 홍보를 위해 인기 토크쇼인 배우 우피 골드버그의 ‘The View’와 ‘스티븐 콜베어쇼’(BTS, 블랙핑크가 출연했던)에 나왔고 제 73회 토니어워즈 오프닝 무대에도 섰다. ‘더 프롬’은 토니상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저도 알고 놀란 사실인데요. 1947년부터 시작한 토니어워즈 무대에 선 한국 국적의 배우가 제가 처음이라는 거예요. 굉장히 벅차고 어깨가 무거워지는 순간이었어요.”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 보이지 않는 인종의 벽은 아직 높다. ‘미스 사이공’ ‘왕과 나’ 같은 동양을 소재로 한 작품을 제외하고 동양인 배우가 설 수 있는 무대는 거의 전무하다. 그가 ‘더 프롬’에 합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보이 경험으로 인한 역동적인 춤사위와 성악으로 기본을 충실히 다진 보컬 실력 덕이었다. 공연 중 그의 독무 무대가 생긴 것도 이런 이유다.

결국 돌고 돌아 남들보다 늦었다고 생각했던 그의 이력들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유일무이한 자산이 된 셈이다.

“제가 TV에 나온 모습을 보고 많은 동양 친구들이 메시지를 줬어요. ‘무대를 보고 놀랐다. 주민 배우를 보고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고요. ‘동양인을 대표해서 무대에 서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매일매일 공연을 허투루 하지 못하겠더라구요. 공연이 끝나고 저를 만나고 싶어 기다리시는 분도 있었거든요.”

그에게는 누구보다 고마운 사람이 있다. 대학 내 ‘유학생 매니저’ 활동을 했던 한국계 미국인 아내다. 연애시절 O1 비자를 낼 비용을 마련하던 그에게 아내는 ‘그 돈으로 우리 결혼식에 쓰자’라며 선뜻 손을 내밀었다.

“아내와 결혼하고 일이 더 잘 풀렸어요. 아내는 떠돌이 유학생이었던 제게 안정된 가정을 만들어줬고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영어에 큰 도움을 줬어요. 은인같은 존재죠. 평생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줘야 할 사람이에요.”

쉼표 없이 달려온 지난 5년간 그는 단 한번도 한국 땅을 밟은 적이 없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만큼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의 수다 소리가 너무 따뜻하게 전해져왔어요. 한국말, 한국 간판을 보는데 마음이 너무 편하더라구요. ‘더 프롬’을 끝내고 다음 작품이 정해져있어 이번이 아니면 오지 못할 것 같아 왔는데 너무 좋아요. 5년 만에 갖는 꿀 같은 휴식이에요”

금의환향이다. 댄스팀 계약서를 찢으며 ‘인서울’을 가서 평범한 삶을 살라고한 부모님에게, 그는 더없이 자랑스러운 아들이 됐다.

“부모님은 제 작품인 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 ‘K팝’을 보러 이모님들과 함께 단체로 미국에 왔었어요. 공연을 보고 그때부터 ‘우리 주민이 미국 보낸 거 너무 잘했다’고 해요.”

20대의 수많은 방황과 시행착오가 30대에 보상으로 돌아왔다.

“저는 20대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저 집념으로 버틴 거죠. 그 보상이 지금 돌아오는 것 같아요. 이번에 옛동료와 형들을 만났는데 ‘미국물을 먹더니 교포 2세 같은 분위기가 난다’고 하더라구요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제가 발자취를 남기는 만큼 누군가에게는 크게 기억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책임감도 커지구요. 많은 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어요.”

영화, 넷플릭스 드라마, 뮤지컬, 광고, 성우까지 다양한 장르의 현장을 접한 그는 뉴욕에서 더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큰 역은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하다보니 ‘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회를 잡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뉴욕은 늘 열려있어요. 뮤지컬은 주요 배역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자신을 발전시킬 거예요. 또 할리우드도 겨냥하고 있어요. 물론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도 활동해보고 싶구요.”

그는 성공한 스타가 아닌,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강한 배우’가 되고 싶다.

“관객은 공연을 보며 힐링을 하거든요. 메시지를 가진 좋은 작품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시선을 전할 수 있어요. 그래서 뮤지컬이나 영화 예술이 중요하고 배우가 더 잘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좋은 작품은 좋은 사람 나아가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빵 떠서 편하게 살자?’는 말은 아예 머리에 없어요. 늘 비주류였던 저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말이기도 하고요. 건강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