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68)과의 인터뷰 자리에 들어서자 인터뷰 공간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물건이 있었다. 와인이었다. 웬만하면 작품 관련 인터뷰는 잘 하지 않는다는 그, 영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인터뷰에 나서야 하는데 뭔가를 꾸미기 싫은 성격 때문에 영 이 분위기가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분위기와 기분을 한껏 높이는 방법을 택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 조금씩 들이키기 시작한 와인으로 윤여정의 얼굴은 금방 홍조를 띠었다. 누가 10~20대를 자유로운 나이라고 했나, 여배우로는 이미 시간을 보낼 대로 보낸 그는 무언가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었다. 자칭 ‘자연인’이라 주장하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자유가 느껴졌다. 그와의 인터뷰는 여러 의미로 재미있었다. 영화 속 배역처럼 스스로를 어떻게 누르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극중에 성칠(박근형)만 모르는 그의 비밀을 조금씩 흘려주고 싶었어요. 대중들이 눈치를 챌 것 같아서요. 근데 전혀 반전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없게 편집이 됐더라고요. 뭐 나는 잘 모르고 편집은 모르는 거니까. 시나리오 받으면서도 ‘얘가 꽃뱀이야, 뭐야’ 싶었거든요. 할머니를 쫓아다니는 영화가 이상하긴 했어요.”

그의 전매특허(?)인 독설이 인터뷰 초입부터 시작된다. 그는 강제규 감독의 영화 <장수상회>에서 극중 성칠에게 어느새 다가와 그를 흔드는 고운 여인 금님을 연기했다. 70대 노인의 로맨스, 지금의 흥행법칙에서는 다소 벗어난 소재의 영화에서 귀여운 노년을 연기한 윤여정은 확실히 영화 속과 실제 모습이 달랐다.

특히 와인이라는 휘발유를 단 그의 독설열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신나게 달렸다. 강제규 감독에 대해 애석한 점을 이야기하다가 금세 호흡을 맞췄던 박근형에게 과녁이 옮겨간다. 두 사람은 1971년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숙종과 장희빈을 호흡을 맞췄다.

“극중에 왈츠를 추는 장면이 있는데 연습을 안 해온 것 같더라고요. 오래 사는 게 좋은 게 선배를 대하는 거죠. 예전에는 뭐라 그러면 듣기는 싫지만 듣는 척 하는 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막 같이 화를 냈죠. ‘왜, 화를 내? 틀린 거잖아’하고요. 그렇게 하니까 좋았어요. 맞짱(?)을 뜰 수 있으니까. 꼭 자기가 틀려놓고 화를 내더라고요. 진짜 ‘방귀뀐 놈이 성낸다’는 옛말이 맞나 봐요.”

기자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뻘이 되는 배우 박근형에게 거침없이 독설을 하는 장면에서는 “와~”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과거의 여배우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이 과감함과 솔직함이 요즘에는 조금은 별난 캐릭터로 여겨진다. 윤여정은 연기인생 50년을 지나는 동안 청순하고 고혹적인 여주인공에서 시작해 엄마, 할머니 등 다양한 역할을 지냈지만 최근에는 특유의 호쾌한 성격과 자유분방함은 유독 대중에게 깊이 각인돼 있다.

이는 그가 나영석PD의 예능에서 비교적 솔직한 그의 모습을 자주 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나영석PD의 여행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김자옥과 후배 김희애, 이미연, 이승기 앞에서 여행의 ‘좌장’ 격으로 활약했다. 이후에는 나PD의 귀농 예능 <삼시세끼-정선편>에서 이서진과 옥택연을 최화정과 함께 살뜰하게 살피는 모습도 보였다.

“나영석씨가 사람이 집요하더라고요. 나는 원래 늙으면 배우로 평가받을 때는 각오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예능을 나가서 이렇게 저렇게 평가받는 건 싫었어요. 왜 댓글로 욕을 먹어야 하나 싶었죠. 하지만 그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주말마다 만나자고 하는 거예요. 결국 제가 함락됐엉. 제 아들 보다 한 살 아래인데 같이 일을 해보니까 역시 살아남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삼시세끼>의 경우도 망하는 줄 알았어요. 사람은 망해봐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때가 타이밍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더욱 잘 된 거죠. 기가 막혔어요.”

그는 연출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홍상수 감독의 뮤즈’라는 일각의 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2009년 개봉한 <하하하>로 처음 인연을 맺었고 이후 <다른 나라에서>에 이어 지난해 개봉한 <자유의 언덕>까지 홍 감독의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매일매일 쪽대본을 줬던 홍 감독에게 “나이가 많아 대사 외우는 게 힘들다”고 항의했던 사례는 유명한 일화다.

“나는 홍 감독의 ‘뮤즈(영감을 주는 여주인공)’기 아니예요. 항상 단역만 했죠. 밤을 막 새서 찍더라고요. 이게 무슨 경우야. 안 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시사회를 보면서 제일 못된 게 저였던 거죠. 그래서 ‘앞으로 시켜주면 잘 할 게요’라고 했는데 잊지 않고 부르더라고요. 꼭 노인 역으로만. 홍상수의 장기도 잘 알고, 그 오만함도 알기 때문에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조금의 돈으로 장인정신을 갖고 만들잖아요.”

이렇게 실컷 주변의 배우, 연출자에 대한 독설을 내뱉던 그도 스스로의 연기인생을 돌이키자 조금은 감성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특유의 쿨함은 어디가지 않는다. 사람으로서는 나이가 들지만, 배역은 나이가 들지 않는 주의인 것이다. 그는 예순 이후의 삶을 즐긴다고 말했다.

“배우라는 직업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직업이라고 생각하죠. 우리 때는 선남선녀만 배우를 했어요. 너무 예쁜 사람 아니면 배우를 못하는데 저는 배우가 됐죠. ‘저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아요. 그게 지금까지 계속 하는 이유일 수 있죠. 하지만 지금은 즐기는 단계에요. 60이 넘어서는 즐기기로 했어요. 연기를 일로 하면서 많이 힘들었고. 돈 때문에 할 때도 있었는데 앞으로는 즐기기로 스스로 규칙을 정했어요. 하나씩 하나씩 하려고요.”

그는 차기작으로 김고은과 함께 하는 <계춘할망> 해녀 역을 택했다. 이유는 하나 “안 해본 역이라서”였다. 배우가 예술가이고, 예술가의 특징이 자유라면 윤여정의 모습은 그 명제를 가장 멋스럽고도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사례였다. 덕분에 인터뷰 후 와인이 덩달아 마시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