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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훈의 스포츠IN] 고의기권?…16세 양예빈에게 배워라

지난 28일 예천공설운동장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KBS배 전국육상대회 여고부 1600m 계주 결선에 두 팀만 출전한 겁니다. 인일여고는 출발 10초 만에 기권했습니다. 우승은 용남고에 돌아갔습니다. ‘육상샛별’ 양예빈(16)은 마지막 네 번째 주자로 나서 홀로 트랙을 돌았습니다. 사전소집에서 출전 신청한 팀은 4개였습니다. 그런데 2개팀이 다음 날 레이스 1시간 전 최종소집에서 기권 의사를 밝혔습니다. 당초 대회 개최에 앞서 출전 의사를 밝힌 9개 팀 중 5팀은 레이스 전날 사전소집에 불참했습니다.

기권 이유는 다양합니다. 선수가 다친 팀도 있었습니다. 선두와 현격한 차이를 걱정한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중장거리 선수 위주로 꾸려져 단거리 선수들과의 경쟁이 껄끄럽다는 이유로 기권한 팀도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전반기에 취소된 대회가 잇따라 열리면서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기권한 경우도 있답니다. 그런데 무더기 기권 사태는 어이없게도 TV 생중계 때문이라는 웃지 못할 의견도 나옵니다. 용남고에 너무 크게 뒤지는 장면이 생중계될 경우, 주위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계가 안 됐다면 용남고에 크게 져도 은메달, 동메달로 기록 격차를 숨길 수 있었을 테니까요. 메달에 상금도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대학 진학에 필요한 성적을 이미 낸 고교 팀으로서는 굳이 레이스에 나서지 않아도 됐던 모양입니다.

육상에서 적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록과의 싸움이죠. 양예빈과 기록 차가 커 뒤집는 게 불가능해도 레이스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면 기뻐해야 했고요. 집단 기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선택은 동료애, 동업자 존중, 기록 경신 의지, 육상 정신을 모두 걷어찬 행동이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용서받기 무척 어려워 보입니다.

이번 대회를 치르기 위해서 예천군은 1억8000만원을 썼습니다. 코로나19 속 참가 팀이 줄었지만, 예천이 육상 선수, 육상 지도자들을 위해 뭉칫돈을 낸 겁니다. 예천은 200m 트랙 실내육상장도 건설했고 주니어 국제대회도 유치하는 등 육상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지자체입니다. 대한육상연맹도 코로나19 방역 등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 대회를 운영했습니다. 선수, 꿈나무, 지도자들을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이런 노력과 수고, 정성이 일부 지도자들의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행동으로 빛을 잃어 너무 개탄스럽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을 처벌할 방법은 딱히 없는 모양입니다. 규정상 기권이 인정되는 데다 기권했다고 징계할 근거도 없습니다. 기권 사유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를 증명할 방법도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대한육상연맹 징계보다 더 무서운 벌이 있다는 걸 지도자들은 뼈저리게 기억해야 합니다. 육상을 향한 팬들의 관심이 더욱 줄어들 겁니다.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더 나빠질 겁니다. 예천군이 입은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육상 자체 존재감과 가치도 하락할 겁니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이 별다른 파문을 일으키지 못한 채 그냥 잊혔다는 걸 더욱 무서워해야 합니다. 그걸 육상 지도자들은 천만다행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만큼 육상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존재감이 미비하다는 증거니까요.

“(혼자 뛴다는) 그런 것보다 일단 제 (달리는) 동작을 생각하며 뛰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 개인 최고 기록에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나 홀로 레이스를 마친 양예빈의 말입니다. 고의 기권 의혹을 받는 지도자들, 확실히 기억하고 철저히 반성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