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를 지나 7번 국도를 따라간다. 짙푸른 녹음, 쪽빛 바다가 출렁이는 길 끝은 북동쪽 최북단 마을 고성이다.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이곳에 사찰이 있다.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금강산 자락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사찰이다. 민간인출입통제선 북쪽에 위치한 까닭에 한국전쟁 이후 통행이 제한되다 1989년부터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35년간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다 보니 세속의 때가 덜 묻었다. 인적이 뜸해 한적하기가 그지없는 이곳은 사명대사의 사리와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를 모셔 의미가 특별하다.
간성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진 거집읍 냉천리에 위치한 건봉사는 국내 4대 사찰 중 하나.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양이 연꽃을 닮은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해 원각사라 이름 붙였다.
이후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중수해 서봉사라 개칭했고, 공민왕 7년(1358년) 나옹화상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란 이름을 되찾았다. 세조 10년(1464년)에는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역대 임금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규모나 사찰의 내력으로 보아 건봉사는 한국불교의 대성지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엔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등 강원도 일대 대부분의 사찰들을 말사로 거느린 3,183칸의 대찰이었다. 하지만 1878년 산불에 사찰은 전소됐고, 이후 복원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또다시 폐허가 돼 현재는 신흥사의 말사가 된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교동천 제방도로를 따라 홍예교를 건너면 고승들의 영혼이 봉안된 부도밭이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건봉사 관문인 불이문. 사찰 입구에 ‘금강산 건봉사’라 적힌 문구가 눈길을 끈다. 남한에서 시작되는 금강산자락 초입에 자리잡은 까닭에 금강산이란 이름이 덤으로 붙었다.
1920년에 세운 불이문은 한국전쟁 당시 피해를 입지 않아 온전한 형태다. 불이문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 금강산 구룡폭포 암벽에 새져진 ‘미륵불’을 쓴 주인공이다.
‘두 마음을 가지지 말고 오직 불심 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의 이곳 불이문은 타 불이문과 달리 기둥이 4개다. 기둥에는 전쟁 때 맞은 총탄 자국이 선명하고, 앞 기둥 두 개에는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 ‘예리한 지혜의 칼’로 불리는 금강저는 사찰 수호를 의미한다.
건봉사가 과거 번창했던 대찰이었다는 중거는 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을 일으켰고, 일제 때인 1906년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이곳에 봉명학교를 세워 항일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불이문 앞 사명당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비는 이를 기념한 것이다.
불이문을 뒤로하고 개울을 따라 걷다보면 길은 두 갈래. 맞은 편 길은 적멸보궁으로 통하고, 오른쪽 능파교를 건너면 대웅전이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는 건봉사 대웅전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 숙종 30~33년(1704~1707년)에 축조됐으나 영조 21년(1745년)과 고종 17년(1880년)에 무너진 것을 최근에야 복원했다.
속세의 번뇌를 계곡물에 씻어버리고 다리를 건넌다. 대웅전에 이르려면 십바라밀을 거쳐야 한다. 두 개의 돌기둥에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방편, 원, 력, 지 등 피안의 세계로 가기 위한 수행법이 담겨 있다.
십바라밀과 봉서루를 지나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이 염불원이 있다. 염불원에는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가 봉안돼 있다.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인 건봉사는 한국전쟁 당시 건물과 국보급 보물들이 모두 소실돼 안타깝지만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오던 길을 되돌아 능파교를 건너 적멸보궁으로 간다. 건봉사의 옛 절터였던 이곳에는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 3과가 보관돼 있다.
건봉사에 들러 꼭 가볼 곳은 등공대. 건봉사 대웅전 오른쪽 오솔길을 따라간다. 왕복 50분 거리다. 굳게 잠겨진 두 곳의 철문을 통과하는 길은 사람의 발길을 타지 않은 전형적인 오솔길. 길 양쪽은 지뢰밭이다.
이곳은 과거 민통선 지역으로 묶였으나 10여년 전부터 건봉사 종무실에 사전 통보하면(10명 이상) 안내를 받아 갈 수 있다.
등공대는 신라 경덕왕 17년(758년) 발징화상이 신도 정신·양순 등과 함께 최초로 염불만일회를 개설한 곳. 기도결사에는 31명의 승려와 1,820명의 신도들이 참여했다. 당시 기도에 참여한 염불승 31명은 극락왕생했다. 1920년 돌무덤이었던 이곳에 한 신도가 100원을 보시해 탑을 세웠다.
탑 표면에는 무수한 총탄자국이 남아 한국전쟁 당시 이곳이 치열한 격전지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지금은 주춧돌만이 옛 번창했던 시절을 증거하고 있지만 사찰을 한 바퀴 둘러보면 금강산 남쪽 너른 자락에 대가람을 이루었을 당시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고성 글·사진 윤대헌기자 caos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