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랑~딸랑’
소띠의 해, 귀가 솔깃한 영화 한편이 나왔다. ‘워낭소리’다. 조용한 농촌을 배경으로 80대 노인과 소의 일상을 그린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다. 선댄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고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는 등 작품·대중성을 겸비했다. 흔히들 ‘다큐는 지루하고 재미없다고’들 한다. 갑자기 ‘개그콘서트’의 달인이 생각난다. “‘워낭소리’ 보셨어요? 안 봤으면 말을 하지마세요~.” 2009년, 새로운 형식의 재미있고 감동적인 다큐 영화를 들고 나온 44살의 노총각 감독 이충렬을 만났다.
-영화는 처음이라고 들었다.
“미술을 전공하고 처음엔 애니메이션을 하다가 10년 넘게 방송영상을 만들어왔다. 방송쪽 독립 프로덕션에서 조연출부터 시작해 아침프로, 코미디·노인·스포츠·어린이프로 등 안 해본 것이 없다. 사람은 기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농촌 출신으로 다양한 사회경험을 한 게 이번 작품을 만드는 데 많은 밑거름이 됐다.”
-육체적·경제적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굶주렸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자존심 하나로 버텼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겠지만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계속 줄타기를 했다. 돈이 안되는 작품들은 비웃음거리가 됐고 거듭된 실패는 패배감에 젖게 했다. 이 때문에 울화병을 심각하게 앓았다. 공황장애로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워낭소리’는 마지막 승부수였다.”
-왜 소였나.
“모든 의욕이 사라질 무렵, 아버지가 문득 생각났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나’와 ‘나에게서 잊혀지는 아버지’가 대비됐다. 대상을 잡았다. 전제는 나의 아버지고 그를 닮은 소였다. 한 때는 가장 빛났으나 이제는 쓸모 없어져 버려진 사금파리. 그것을 그릇으로 되살리자는 차원에서 기획했다.”
-촬영이 쉽지 않았을텐데.
“너무 어려웠다. 부합되는 모델을 찾는 데에만 5년이 걸렸다. 또 비용 때문에 상주하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데려온 촬영감독마다 ‘못하겠다’며 등을 돌렸다. 그래서 송아지 낳는 장면, 외양간 무너지는 장면, 소가 죽는 장면 등 임팩트한 것은 다 놓쳤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은 결과를 냈다. 소가 쓰러지는 장면은 없었지만 넘어진 소 앞에서 먼저 보인 것은 할아버지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장면이 축소되면서 관계에서 얻는 감동이 더 커졌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소가 죽기 직전 일하러 나갈 때다. 할아버지가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타고 다니던 소를 안 타더라. 다리도 불편한 양반이 소의 짐을 덜고 쩔뚝거리며 걸어갔다. 야속하리만치 소에게 일만 시켰던 그도 ‘늘 소에게 미안함이 있었고, 편치 않았던 것이 분명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소가 죽었을 때 워낭을 빼주는 모습에선 성자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존의 다큐와 다르다.
“예전의 다큐를 요리로 비유하자면 싱싱하고 영양 많은 건강식이었다. 그만큼 시대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비판과 계몽 측면이 강했다는 뜻이다. ‘워낭소리’는 원형질을 보존하되 나만의 조리법으로 소스를 넣고 조미했다. 단지 농촌기록에 그치지 않으려고 전적으로 인물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맛도 있고 몸에도 좋은 음식이고 싶었다.”
-반응이 좋다. 선댄스영화제에도 초청 받았다. 향후 계획은.
“첫 작품으로 너무 과하게 누린다는 느낌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감도 있다. 다른 재주가 없으니 방향 전환은 없다. 논픽션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고 싶고, 그 안에서 작은 것의 위대함을 알리고 싶다.”
-결혼 계획은 정녕 없는 건가.
“일단 가진 것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으니…. 2003년도 이후 한푼도 못벌었다. 아르바이트로 끼니는 겨우 떼우는 정도였다. 결혼했으면 벌써 쫓겨났을 거다. 가족의 희생도 못할 짓이고 그래서 결혼을 못한 것 같다.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다.(하하하)”
<글 심재걸기자 sjg@kyunghyang.com·사진제공 인디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