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푸르른 날에>(남산예술센터/신시컴퍼니 공동 제작)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지만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이다.
<푸르른 날에>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휘말린 어느 남녀의 사랑과 그 후 30여 년의 인생 역정을 구도(求道)와 다도(茶道)의 정신으로 녹여낸 3회 차범석 희곡상을 수상한 정경진 작가의 동명 희곡이 원작. 수상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던 사연들을 현재와 과거, 미래가 공존하는 구조로 그려낸 눈물과 감동이 있는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여기에 지난해 <칼로막베스>로 평단과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연출가 고선웅이 각색·연출을 맡아 촌철살인의 입담과 특유의 리듬감으로 재탄생시켰다. 신파와 통속, 눈물과 웃음을 넘나들면서도 결코 5.18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는다. 고선웅 연출가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목도(目睹)가 아닌 현재를 환기해주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푸르른 날에>는 어둡고 무거운 서사와 통속적인 멜로드라마 대신 전통적인 사실주의 극에 아이러니와 위트를 더한 다소 과장되며 희극적인 연극어법을 취한다. 특히 시종일관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서로 사랑했지만 항쟁에 휘말려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31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남녀의 대화는 진부한 멜로드라마식 대사를 살짝 비틀면서 유쾌한 통속극이 된다. 주인공들은 슬픈지만 기쁜 척, 사랑하지만 아닌 척, 힘들지만 담담한 척, 거짓말같이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또 기존의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다뤘던 작품들과 달리 <푸르른 날에>는 역사의 재연보다는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적 비극의 실체를 이루어지지 못한 남녀의 사랑으로 은유함으로써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서정주의 시와 송창식의 노래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과 기대를 펼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19명의 중견배우와 젊은 배우이 어우러져 일사불란하고 유쾌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한여름 밤의 꿈> <상사몽> 등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였던 무대디자이너 이윤수, 영화 <방자전>, <음란서생>, <혈의 누>의 의상을 담당했던 디자이너 정경희, 감성과 이성을 넘나드는 음악과 현장감 있는 음향으로 무대를 채워주는 음악감독 김태근이 힘을 합쳐 완성도를 높였다.
지난 10일 막이 오른 <푸르른 날에> 29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된다. 초등학생 이상 관람가(중학생 이상 권장), 전석 2만 5000원. 문의 1544-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