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곡의 시대, 3대 저항가수들

입력 : 2012.05.08 16:05

‘인생 별 거 아니예요. 살아보니 거기서 거기예요…. 날 버리고 널 버리고 망가지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최근 기념 앨범을 낸 김창완 밴드는 신곡의 제목을 스스로 ‘금지곡’이라고 붙였다. 김창완은 진흙탕 선거판과 학교폭력 등 온갖 사회문제에 환멸을 느끼면서 만든 노래에 대한 반어적 표현을 제목에 담았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 MB 정권은 청소년 보호를 명목으로 노래에 마구잡이로 붉은 딱지를 붙여 반발을 산 적이 있었다. ‘술’만 들어가도 금지곡 딱지를 붙였던 심의위원장은 결국 사퇴했다.

저 70년대 중반, 금지곡의 시대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만들고 국민들을 마구잡이로 탄압하던 시대. 그 한 가운데서 맨몸으로 싸우면서 버티던 작곡가와 가수들이 있었다. 당연히 오랫동안 그들이 만든 노래는 금지곡으로 묶였다. 금지곡을 부르거나 소유하고 있어도 불온한 사상을 가진 불순분자로 몰렸던 시대였다. 당대의 젊은이들은 마치 암구호처럼 금지곡을 들었고, 술집 한 구석에서 나지막히 불렀다. 김민기와 한대수, 양병집은 그들의 무기인 오선지와 기타를 들고 답답한 세상과 싸웠던 젊은 투사였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 꽃 피고 눈 내리고 어언 사십년 /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늙은 군인의 노래’ 일부

[아이콘, 그때 그 시절]금지곡의 시대, 3대 저항가수들

김민기가 쓰고 양희은이 불렀던 이 노래 역시 당연히 금지곡이었다. 당시 서울대생 김민기는 ‘71동지회’ 회원들과 친분이 있었다. ‘71동지회’는 1971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학교에서 제적당한뒤 강제징집된 학생회 간부들이 만든 모임이었다. 역시 그가 만든 ‘아침이슬’과 ‘공장의 불빛’ 등의 노래도 금지곡으로 묶였다. 그러나 잡초를 밝으면 더 무성하게 자라는 법이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학생운동 현장에서는 물론 이후 노동운동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불리던 ‘운동권 가요’가 됐다. 역시 김민기가 쓰고 양희은이 부른 ‘작은 연못’도 금지곡 리스트에 올랐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수 없게 되었죠.’

다분히 철학적이고 은유적인 노래였다. 김민기는 연못 속 붕어를 소재로 분단된 남북한이 서로 싸운다면 공멸 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아이콘, 그때 그 시절]금지곡의 시대, 3대 저항가수들

70년대 혜성처럼 나타나 포크음악을 주도했던 한대수 역시 금지곡의 대명사였다. 당국이 그의 노래 ‘물 좀 주소’와 ‘행복의 나라’에 금지곡 딱지를 붙였지만 젊은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면서 명곡 반열에 올랐다.

‘물 좀 주소 / 물 좀 주소 / 목 말라요/ 물 좀 주소’로 시작되는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장막을 거둬라 / 너의 좁은 눈으로 / 이 세상을 떠보자’로 시작하는 ‘행복의 나라로’는 유토피아를 노래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이들 노래와 함께 같은 앨범 <멀고 먼 길>에 수록된 ‘옥이의 슬픔’ 역시 옥이를 내세워 당시의 그늘진 사회상을 비판한 노래로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여야 했다.

[아이콘, 그때 그 시절]금지곡의 시대, 3대 저항가수들

김민기, 한대수와 더불어 1970년대 3대 저항가수였던 양병집의 첫 음반 <넋두리>(1974)도 한 젊은 아티스트의 저항을 담은 앨범이었다. ‘내 안경이 졸도할 만한 서울에 올라와 나도 한번 벌고 싶어 헤매 다녔으나 내 맘대로 되지 않더라’(서울하늘),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참다, 참다 스러져간 꽃’(잃어버린 전설), ‘타박타박 타박네야 너 어드메 울며 가니’(타박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역, 훗날 김광석이 ‘두 바퀴로 가는…’으로 리메이크) 등 외국 포크곡에 붙인 가사는 인상적이다. 그는 경제개발과 국가재건을 목표로 달려온 당대의 대한민국이 빈부격차와 이농현상 등으로 곪아가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결국 이 음반은 수개월만에 금지앨범으로 묶여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 채 단명했다.

여하튼 이들 세 싱어송라이터는 박정희 정권이 비명횡사한 뒤에 또 다른 군부정권인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오랫동안 금기어였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고 불렀던 노래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젊은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마치 ‘들불’처럼 번지며 온 들판을 다 태웠고, 그 힘으로 ‘민초’들의 삶 또한 위로받을 수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시대를 살던 이들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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