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음의 추억…‘춘향가’ 한소절이 절로 흥얼흥얼
“육모정은 어릴 때부터 소리를 하던 곳이다. 고향 남원을 갈 때마다 꼭 들러 옛 추억을 떠올린다. 지금도 행사와 공연, 소리를 하는 단골 장소다. 용소 너럭바위를 가운데 두고 마주한 육모정과 용호정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소리가 잘 나온다. 구룡폭포에서 득음을 한 분들이 많지만 어릴 적 추억이 남아 있는 육모정에 더 애착이 간다.”(명창 안숙선)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은 전북 남원은 판소리 고장이다. 춘향가·흥부가 등이 이 고장에 전승돼온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안숙선 역시 이곳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판소리를 배우고 춘향제를 통해 소리꾼으로 이름을 얻었다.
▲ 어릴적 놀이터이자 소리터… 전국 소리꾼 공연 기억 생생
구룡계곡 등 9곡 돌아보면 지리산 깊은 맛 온몸 체감
그가 으뜸으로 꼽은 육모정(六茅亭)은 주천면 호경리 지리산 구룡계곡 입구에 점잖게 앉아 있다. 이름처럼 생긴 모양이 육각형이다. 1572년(선조 5년) 남원도호부 관내에서 만든 정자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원동향약 계원들이 모임을 갖던 곳이다. 육모정은 1961년 수재로 유실된 뒤 1997년 복원됐다. 옛 육모정 자리는 구룡계곡 입구 큰 바위 위다.
안씨는 “육모정은 어릴 적 놀이터이자 소리터였다. 어른들을 따라 육모정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 당시 전국에서 소리꾼들이 모여 공연을 펼쳤는데 너무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때 내 나이가 아홉 살이었다. 나에게는 소리 인생 대부분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고 말했다.
구룡계곡 초입에 덩그러니 들어선 육모정은 지리산을 등지고 용소·용호정과 어우러진 풍광이 그림 같다. 주변 볼거리도 제법 많다.
육모정 아래 거대한 너럭바위를 거느린 용소는 구룡계곡 9곡 중 제2곡이다. 물이 옥처럼 맑아 용이 살았다고 해서 옥용추(玉龍湫)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200m 아래에 자리한 송여동(약수터)이 제1곡이지만 접근이 어려워 용소가 구룡계곡의 실제 관문인 셈이다. 정자에서 돌계단을 따라 너럭바위로 내려서자 갈라진 바위틈을 뚫고 쏟아지는 물줄기가 세차다.
안씨는 “용소의 너럭바위는 천연 공연장이다. 어릴 때 물놀이를 한 후 너럭바위에서 몸을 말리고 음식을 먹기도 했다. 또 폭포에 맞서 소리를 다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용소 위로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제다리에 오르자 사방으로 시야가 트인다. 다리 건너 우측 언덕에 용호정이 앉아 있다. 울창한 소나무숲과 계곡을 끼고 있는 풍광이 멋스럽다. 이곳 역시 옛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토론했던 곳이다.
육모정 뒤편 산자락 중턱에는 ‘춘향묘’가 들어 앉았다. 100여개 계단을 오르자 커다란 봉분이 정자를 굽어본다. 성춘향의 무덤인 춘향묘는 50여년 전 이곳에서 ‘성옥녀지묘’라 새겨진 지석(誌石)이 발견돼 묘역을 단장하고 가묘를 세운 것이다.
안씨는 “육모정에 들를 때면 판소리 ‘춘향가’를 떠올리며 춘향묘를 찾는다. 이곳에선 나도 모르게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을 생각하며 소리를 흥얼거리게 된다”고 말했다.
춘향의 절개와 지조를 되새기며 용호서원으로 간다. 용호서원은 육모정에서 구룡계곡 쪽으로 100여m 거리. 원동향약계 소속 유림의 선비들이 만든 서원이다. 솟을삼문으로 들어서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얹은 경양사와 목간당, 수성재가 길손을 반긴다. 늙음이 곱게 밴 고택은 자태가 반듯하다.
안씨는 “육모정은 구룡계곡의 일부나 마찬가지다. 예까지 와서 계곡을 둘러보지 않으면 반쪽짜리 여행이다. 천천히 9곡을 둘러보면 지리산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발길은 절로 구룡계곡으로 향한다. 계곡은 만복대·고리봉·세걸산으로 이어진 지리산 서북능선 왼쪽 자락에 터를 잡고 있다. 용호서원을 지나 만나는 삼곡교에서부터 3㎞ 거리의 구룡계곡은 송여동, 용소, 학서암, 구시소, 유선대, 지주대, 비폭동, 경천벽, 구룡폭포 등 아홉 절경을 품고 있다.
백미는 구룡폭포. 남원 8경 중 제1경에 꼽히는 폭포는 30m 길이의 와폭이다.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아홉 마리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개의 폭포에서 놀다 갔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두 갈래 폭포를 이루고, 폭포 밑 소도 두 개다. 멀리서 보면 마치 두 마리 용이 소 하나씩을 꿰차고 놀다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또 다른 이름이 ‘교룡담’이던가.
구룡폭포는 동편제 소리꾼들에게는 성지쯤 된다. 동편제 창시자이자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송흥록 명창이 이곳에서 득음했고 송만갑, 박초월, 강도근 등 내로라하는 국창과 명창들이 폭포에 맞서 소리를 다듬었다.
안씨는 “구룡폭포는 득음의 명소이자 수행의 장소다. 나 역시 폭포 앞에서 소리를 다듬은 적이 있다. 소리꾼이 아니더라도 장쾌하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보고 있노라면 잠시나마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다”고 말했다.
폭포 위쪽 석벽에 새겨진 ‘방장 제일동천(方丈 第一洞天)’이란 글귀가 또렷하다. 방장은 ‘지리’의 다른 이름. ‘지리산 최고의 경치’라는 얘기다.
구룡폭포는 계곡 트레킹을 하지 않고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정령치로 향하는 고기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2㎞ 정도 가면 구룡폭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옆으로 ‘구룡폭포 300m’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숲길 끝에 나무데크가 폭포까지 이어진다.
안씨는 정령치 드라이브 코스도 추천했다. 주천면 읍내를 지나 내기리를 거쳐 정령치에 오르는 12㎞ 코스가 환상적이란다. 안씨는 “남원은 지리산 정기가 곳곳에 깃들어 있다. 한다하는 소리꾼들도 남원을 한 번쯤 거쳐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리산 정기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곳이 정령치 드라이브 코스”라고 말했다.
육모정을 지나 60번 지방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오른다. 길 좌측으로 구룡계곡 협곡이 아찔하다. 고기리 삼거리에서 737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오른쪽으로 향하면 정령치다. 정령치는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에게 성을 쌓고 지키게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고개 꼭대기 휴게소는 최고의 전망대다. 동으로 바래봉과 뱀사골, 서쪽으로 천왕봉과 세석평전 반야봉 등과 남원 시내가 한눈에 잡힌다.
최근 창극 <서편제> 공연을 끝낸 안씨는 “올해는 판소리 5마당 녹음작업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춘향가’ ‘적벽가’는 녹음을 완료했고 ‘수궁가’ ‘심청가’ ‘흥보가’는 작업 중이다. 그는 “작업 틈틈이 여행도 다닐 예정이다. 여행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정령치 휴게소 전망대에 올라 시야를 넓힌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주천, 아득하게 먼 운봉의 너른 들판, 장대한 지리산 자락에 봄색이 완연하다.
■ 찾아가는 길:서울→천안논산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익산나들목→익산·포항 간 도로→완주분기점에서 순천·완주 간 고속도로 오수나들목→17번 국도 남원→남원대교 건너 좌회전→19번 국도 범실마을→730번 지방도로→지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육모정
■ 주변 볼거리:남원을 상징하는 광한루원은 필수 코스다. 춘향전 배경인 광한루는 누각이고, 누각이 있는 정원이 광한루원이다. 광한루 앞에는 영주섬, 방장섬, 봉래섬이 있고 그 옆에 오작교가 있다. 이외에 달궁 오토 캠핑장, 뱀사골, 실상사, 용담사, 백장암, 만복사지, 만인의총, 교룡산성, 춘향 테마 파크, 정령치 마애불상, 남원 자연 휴양림 등
■ 맛집:하나가든(산채정식, 063-626-1812), 새집추어탕(추어탕, 063-625-2443), 남원추어탕(추어탕, 063-625-3009), 이화회관(한정식, 063-625-8332), 유성식당(지리산흑돼지, 063-636-3046), 춘향골찐빵(찐빵, 063-633-7888), 두부마을(두부전골, 063-633-9915), 에덴식당(산채비빔밥, 063-626-1633) 등
■ 축제:‘제83회 춘향제’가 26~30일 남원시 광한루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올해 축제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춘향전 길놀이, 춘향 시대 속으로, 창극 춘향전, 춘향 그네 체험, 판소리 춘향가 연창, 춘향 국악 대전, 춘향 선발 대회 등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또 광한루원 인근에서는 사랑 체험 마당, 풍물 장터가 조성되고 춘향제향, 전국 시조 경창 대회, 전국 궁도 대회, 춘향 사진 촬영 대회, 춘향 백일장 등 문화 행사가 열린다. 야영을 할 수 있는 ‘춘향 캠핑촌’도 올해 새롭게 선보인다. (063)620-4881~5
■ 숙박:남원자연휴양림(063-636-4000), 흥부골자연휴양림(063-636-4032), 지리산용궁가족휴양림(063-636-8253), 구룡관광호텔(063-631-6300), 지라산일성콘도(063-636-7000), 토비스콘도(063-636-3663), 중앙하이츠콘도(063-626-8080) 등
■ 문의:남원시청 문화관광과 (063) 620-6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