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 와서 감탄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람과 나무들이 아름답게 잘 어우러져 산다’는 점이다. 도심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나무이고 숲이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온 한국의 마을들은 마치 동화 속 어느 신비한 숲속 마을처럼 느껴졌다. 헐벗은 민둥산만 끝없이 펼쳐지던 북한의 산천 풍경만 보아온 나로서는 나무로 가득한 푸른 산천이 한없이 신기해 보였다.
그런데 정착하고 몇 해를 살아보니 이번에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남한 사람들은 나무가 있는 풍경의 소중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미 익숙한 일상적 풍경이라 그도 그럴 법하지만 나는 조금 안타까웠다. 그때 나는 ‘나무는 아내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곁에 있으면 소중한지 잘 모르지만, 내 곁을 떠나면 한없이 그리워진다는 면에서 둘은 닮았기 때문이다. 나무와 함께 있어 북한보다 훨씬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내 잃은 홀아비가 친구 내외를 보며 ‘있을 때 잘해라, 제발’ 하고 말해 주고 싶은 것과 비슷한 심정이다.
최근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라는 책을 샀다. 넉넉지 못한 내 살림 형편에 비춰 꽤나 부담스러운 값을 지불하고 이 두툼한 2권짜리 책을 샀다. 이 책을 읽은 이야기를 전하며 나는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말 못하는 나무들이 우리 인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정성을 바치고 기쁨을 주고 있는지, 그것을 아십니까? 모르시면 이제라도 꼭 아셔야 합니다. 나무와 숲이 만든 이 눈부신 아름다움을 말이지요.’
이는 북한에서 온 나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 내가 하면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들어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를 쓴 고규홍은 원래 신문기자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이 책에서 긴 세월 동안 나무의 곁에 있던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백과사전처럼 단순히 식물학적 정보만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리포수목원’의 식물에 관련된 신화와 설화, 식물에 담겨 있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식물과 함께 있던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전한다. 이런 고규홍의 글은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만족시켜 준다. 식물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늘 곁에 두고 펼쳐 볼만한 책이다.
북한은 온통 민둥산 천지다. 일상적인 연료부족 탓에 나무를 베어 땔감을 만들어야 한다.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멀쩡한 나무를 잘라 땔감을 만들어야 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그 때문인지 요즘 지인들이 등산을 가자고 하면 나도 모르게 주춤거린다. 내가 도끼로 찍어 넘긴 나무들의 영령들이 나에게 평생 가책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남한도 산들이 온통 헐벗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예전이라고는 하나 불과 30~40년 전이다. 그 짧은 세월 동안 남한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산천을 가꿨다. 인간의 의지가 놀랍기도 하다.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를 통해 전 세계 1만5000여 종의 식물들을 만났다. 그 방대하면서도 놀라운 식물의 세계 속을 거닐면서 나는 내 지난 인생을 놓고 나무와 이야기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가 살려고 베어야 했던 나무들아. 정말 미안하다. 이제 너희와 어울려 평생을 살다가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내 인생 다 마무리 지으면, 너희의 그 넉넉한 품으로 들어갈게. 부디 그때는 용서해 주렴….’(고규홍 지음 /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