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대들보 아래 향 좋은 차… 가을 고택 풍경에 취하다
자재 구하는데 3년, 짓는데 6년 공들인 200년 고택
배산임수 아닌 평지·ㄱ자 모양 안채 등 독창성 발휘
합각의 해와 달은 음양 이치· 5색 화방은 오행 ‘철학 담은 집’
조견당(照見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는 <반야심경>의 첫 구절을 따서 만든 당호는 글자대로 해석하면 ‘비추어 보는 집’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속내는 ‘무엇을 보든 선입견이나 사념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집은 주인의 성품을 닮는다’고 하니, 고택은 집주인의 ‘중도(中道) 정신’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셈이다. 고택은 집안 곳곳에 숨어 있는 선인들의 지혜와 전통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룻밤 묵어 간다면 풍성한 가을날에 운치를 더해준다.
![[트래블&힐링-그곳에 가면…]강원 영월 고택 ‘조견당’](https://images.khan.co.kr/article/2014/10/22/l_2014102302000961200269391.jpg)
조견당(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1호)은 강원 영월군 주천면 주천1리에 터를 잡고 있다. 주천은 ‘술이 샘솟는’ 고장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옛날에 술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주천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이 샘은 훗날 주천강이 된다. 마을을 감싸 흐르는 주천강은 강원 평창·횡성·홍천군에 걸쳐 있는 태기산(해발 1261m)이 발원지다. 횡성군 강림면을 가로질러 온 물줄기는 영월 수주면과 주천면을 두루 적시고 한반도면 신천리에서 평창강과 몸을 섞어 ‘서강’으로 이름을 바꾼 뒤 동강과 합류해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주천(酒泉)’이라는 마을과 강의 이름은 유래가 재미있다. 그 옛날 주천면에 술이 솟는 샘이 있었는데 양반이 잔을 들이대면 청주가, 천민이 잔을 들이대면 탁주가 솟았다. 한데 어느 날 한 천민이 양반 옷을 입고 잔을 들이대며 청주를 기대했지만, 샘에서는 탁주가 쏟아졌다. 이에 화가 난 천민이 샘을 부숴 버리자 이후부터는 술 대신 맑은 물만 흘러나와 강이 됐다고 전해진다.
주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를 건넌다. 이즈음 수위를 낮춘 물줄기는 맑고 고요하다. 마을로 들어서자 숯불에 고기 익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주천면은 과거 ‘꺼먹돼지 먹거리촌’으로 유명했다. 꺼먹돼지를 팔던 음식점은 지금 한우를 파는 다하누촌으로 바뀌어 손님맞이에 한창이다.
다하누촌을 지나 마을 고샅길로 파고들면 황토담을 두른 고택이 단아하게 앉아 있다. 담벼락 모퉁이에 뿌리박은 늙은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500살을 훌쩍 넘긴 밤나무다. 모진 세월을 버텨낸 당당한 모습이 마치 고택을 지키는 수호신 같다. 고택으로 들기 전,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담벼락과 마주한 바깥 풍치가 멋스럽다. 소나무 정원과 어우러진 쉼터에는 통나무 의자가 놓여 길손을 쉬게 한다. 제멋대로 구부러진 소나무 사이로 시야에 들어오는 고택은 한 폭의 그림이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마당이 시원하다. ‘김종길 가옥(金鍾吉 家屋)’으로도 불리는 조견당은 1827년(순조 27) 현 주인인 김주태씨의 10대조 김낙배가 지은 중부지방의 대표적 반가(班家)다. 200여 년 세월을 품은 고택은 현재 안채만 달랑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120여 칸에 달했다. 목재와 자재를 구하는 데 3년, 집을 짓는 데 6년이 걸려 9년 만에 완공했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됐다.
이후 2007년 사랑채를 복원했고, 2009년에 별채를 신축했다. 한옥 민박 체험을 시작한 것은 2012년. 대부분의 고택이 배산임수를 터로 삼은 것과 달리 평지에 집터를 쓴 점이 독특하다. 안주인 안양 순씨의 안내를 받아 고택을 둘러본다. 왼쪽 별채는 집주인이 기거하고, 오른쪽으로 손님을 맞는 사랑채가 길게 들어앉았다. 사랑채에는 ‘효성재(曉星齋)’라는 이름을 붙었다. ‘새벽별 같은 젊은이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집’이라는 뜻이란다. 사랑채 툇마루는 차(茶) 손님을 맞는 공간이다. 차를 마시며 담장 너머 풍광을 음미해 볼 만하다.

안채 조견당 현판
조견당이 여느 고택과 다른 점은 안채에 숨어 있다. 자연석 기단을 깔고 있는 안채는 ‘ㄱ’자형 모양의 16칸 규모다.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윗방과 안방·사랑방·부엌이 자리하고, 오른쪽은 조견당 현판을 내건 건넌방과 부엌이 이어진다. 아치형 대들보는 800년 된 소나무를 사용했다고 하니, 무려 1000년의 세월을 품은 셈이다.
얼핏 보면 여느 고택과 다를 것 없지만 조견당의 아름다움은 처마와 합각, 벽에 숨어 있다. 처마는 일반 여염집과 같은 홑처마지만 서까래 곡선은 유려함이 돋보인다. 추녀와 선자연은 여인네의 늘씬한 다리처럼 맵시 있게 솟았다.

안채 동쪽 합각과 화방벽
늙어 낡은 집의 아름다움은 합각과 화방벽에서 종지부를 찍는다. 합각은 팔작지붕의 지붕과 지붕이 만나는 측면의 삼각형 벽을 말한다. 집주인의 철학과 가풍이 이곳에 담겨 있다. 자연석을 깎아 단을 쌓은 조견당의 합각에는 해와 달이 장식돼 있다. 동쪽은 해, 서쪽과 북쪽에는 달의 모양을 넣은 것은 음양의 이치라는 게 안씨의 설명이다.
동쪽 합각 아래 화방벽은 오행을 상징한다. ‘흑·백·황·적·청’ 5가지 색의 돌을 다듬어 단을 쌓은 화방벽은 흔히 볼 수 없는 장식이다. 옛 규모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집주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택의 정취를 느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안채 대청과 대들보
서둘러 대문을 나서는데 안주인이 차 한 잔을 청한다. 대청에 걸터앉아 모처럼 여유를 부려본다. 마당을 훑고 지나온 산들바람이 시원하다. 풍경소리에 취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 150년 이상·후손이 직접 관리…관광공사 엄선 ‘명품고택’ 더 볼까
한국관광공사는 ‘명품고택 사업’을 통해 전통한옥을 선정, 국내외 관광객에게 우리 문화와 전통을 알리고 있다. 이를 위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택과 종택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됐거나 150년 이상 된 한옥 중 종부가 직접 집을 관리하고 있는 한옥을 엄선해 명품고택으로 선정한다.
고택은 대대로 이어져온 우리나라 고유의 생활 방식과 전통문화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명소다. 그곳에는 여전히 그 집안의 후손이 고유의 음식과 전통문화를 지켜오고 있고, 이를 손님에게 제공한다.
현재 관광공사 선정 명품고택은 경북 안동의 ‘북촌댁’ ‘학봉종택’을 비롯해 강원 영월의 ‘구우정 가옥’, 경북 의성의 ‘소우당’, 경북 봉화의 ‘만산고택’, 경북 청송의 ‘송소고택’, 경북 영주의 ‘향단’ 경북 상주의 ‘오작당’ 등이 있다.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내 한옥스테이 참조.
■찾아가는 길:서울→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제천 나들목→38번 국도→주천·신림 나들목→82번 국도 다하누촌 방면→조견당
■주변 볼거리:장릉, 청령포, 고씨동굴, 잣봉, 어라연, 김삿갓유적지,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 요선암, 칠랑이계곡, 연하폭포, 별마로천문대, 곤충박물관, 동강사진박물관 등
■맛집:고택 인근에는 한우를 저렴하게 맛볼 수 있는 다하누촌이 있다. 이외 태청산회관(곤드레밥, 033-374-3030), 미탄집(033-374-4090), 장릉보리밥집(보리밥·손두부, 033-374-3986), 대흥식육식당(숯불구이·선지해장국, 033-374-4390) 다슬기마을(033-373-5784) 등
■숙박:조견당에서는 안채와 안사랑채, 바깥사랑채, 별채에서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다. 예약은 전화와 인터넷으로 할 수 있고, 조식을 원하면 조견당에서 준비하거나 인근 식당을 예약해 준다. 또 철마다 다양한 공연과 함께 전통 체험 행사를 진행한다. 이외 푸른하늘펜션(033-374-0808), 동강포도원(033-374-8818), 뗏목민박(375-0752), 주리펜션(374-5756), 하소엘펜션(033-374-1276), 강사랑래프팅민박(033-375-6926), 동강밀레니엄래프팅민박(033-374-0209), 뗏목민박(033-374-7997) 등
■문의:영월군청 문화관광과 (033)370-2541, 조견당 (033)372-7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