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가 지난 해 ‘8.25 합의’ 이후 중단했던 대북확성기 방송을 재개하기로 한 8일 오후 경기 연천군 중부전선에 위치한 대북확성기에서 방송이 재개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이애란의 ‘백세시대’ 등 최신가요가 8일부터 재개된 대북 확성기 방송을 탄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북방송을 통해 나가는 우리 가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1962년부터 시작된 휴전선 대북 방송에서 가요는 주요한 콘텐츠 중 하나였다. 주로 당대의 유행가가 선정됐는데, 송영선 전 의원이 국방부로부터 제출받아 2010년 발표한 ‘남한 확성기 베스트 5’ 자료에 따르면 대북 확성기 방송과 대북 FM 방송에서 가장 많이 튼 가요 장르는 트로트다.
1980년대엔 ‘꿈에 본 내 고향’ ‘머나먼 고향’ ‘모정의 세월’ ‘고향역’ 등 가장 많이 튼 4곡이 모두 나훈아의 노래이다. 나머지 한 곡이 1939년 김영춘이 발표한 곡인 ‘홍도야 울지마라’였다.
1990년대엔 ‘네 꿈을 펼쳐라’ ‘날개’ ‘아! 대한민국’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애모’ 등이 자주 방송되면서 트로트 일변의 선곡에 변화가 왔다. 2000년부터 확성기 방송이 중단된 2004년 6월까지는 ‘사랑의 미로’ ‘만남’ ‘대동강 편지’ ‘영일만 친구’ ‘독도는 우리땅’ 등이 자주 방송됐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이후 대북 확성기 방송이 재개되면서 국방부는 중국에 거주하는 북한주민들의 의견을 토대로 인기가요 184곡을 선정해 방송했다. ‘다함께 차차차’ ‘신사동 그사람’ ‘또 만났네요’ ‘칠갑산’ ‘아파트’ 등이 가장 많이 방송되었으며 ‘어머나’ ‘무조건’ ‘곤드레 만드레’ 등 최신 트로트곡도 등장했다.
한편 작년 8월과 올해 재개된 대북 확성기 방송에서 가요는 북한 병사의 ‘감성’을 건드리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취급된다. 지난해 방송을 재개하면서 군은 북한 체제의 모순을 고발하거나 남한 체제를 노골적으로 홍보하는 내용은 북한군에게 반발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자제하기로 했다. 대신 일기예보와 남·북한 뉴스 등 일상적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거나, 남성 대신 여성의 목소리를 주로 사용하는 식이다.
반면 최근엔 트로트 위주의 선곡 대신 빅뱅·소녀시대·아이유 등 아이돌의 최신 케이팝이 주로 거론됐다. 심지어 확성기 방송 외에 대형전광판에 걸그룹들의 사진을 대거 띄우자는 주장도 제기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8월말 “케이팝이 어떤 정치적 성명보다 훨씬 강한 한반도의 주요 무기가 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대북 확성기 방송에서 최신가요는 북한군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일으킬까.
일단 이론적인 주장이 있다. 지난해 9월 박주화 통일연구원 통일정책연구실 부연구위원이 발표한 보고서 ‘대북 확성기 방송이 북한에 미치는 심리적 효과’는 “아이유, 빅뱅, 소녀시대의 음악을 듣는 북한 병사들의 뇌에 도파민의 분비가 늘어날 것이며, 결과적으로 북한 군인들은 즐거움을 느낄 것이라고 예측해 볼 수 있다”라고 밝혔다. ‘파블로프의 개’로 유명한 고전적 조건형성 이론에 따라 신세대 군인이 좋아할 만한 음악이 방송됨으로써 대북 방송, 나아가 남한 사회에 대한 호감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박 연구원은 심리변화가 무의식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긍정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노래보다는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후크송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대북 확성기 방송에 최신가요를 내보낸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SNS상에서는 샤이니의 ‘링딩동’ 등 소위 ‘수능 금지곡’을 대북방송에 틀자는 농담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다. ‘수능 금지곡’이란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중독적이어서 수능시험 같은 집중을 요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곡들을 이르는 인터넷 은어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중독성이 높은 최신가요는 북한군에게 남한에 대한 긍정적인 심리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과거 대북 확성기 방송을 통해 나간 노래가 북한에 널리 전파된 사례도 존재한다. VOA(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은 8일 탈북자 인터뷰를 통해 과거 남한가요 ‘독도는 우리 땅’이 북한 병사들을 매개로 북한 전역에 유행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탈북자 출신인 김광진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방문 선임연구원은 VOA에 “내가 알고 있는 제대 군인들은 한국 노래 몇 개씩 부른다. 다 부를 줄 알고 기타로도 연주하고. 공개적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은밀한 여성들과의 데이트 때도 한국 노래를 유행가처럼 부른다. 녹음기에 잡아 갖고 다니기도 하고”라며 대북방송이 북한 병사들을 대단히 즐겁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북한에서 한국의 영화·드라마·예능프로그램 등 소위 ‘한류 콘텐츠’가 음성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은 꾸준히 알려진 바 있다. 반면 미국계 대북방송 ‘자유아시아방송’은 2009년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좋아하는 한국가요를 조사한 결과, 젊은 층에게서 아이돌 노래나 힙합·락에 대한 선호가 있긴 했지만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트로트를 선호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조사에서 탈북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가요로 선정된 곡은 노사연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