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모여 있는 작가들이 ‘동인’이라고 자신들의 그룹을 만들어 예술운동을 하는 일은 미술사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인상파’라는 운동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인상주의’라는 조금은 독특한 이름은 어디에서 오게 된 것일까요. 신기하게도 이 명칭은 작가들이 원했다기보다는 그들을 조롱하려던 비평가의 글에서 시작됐습니다. 바로 그 때로 돌아가 볼까요.
“아르장퇴유에서 클로드 모네는 가끔 그의 이젤을 야외에 설치하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의 이런 작업은 독특했다. 여기 초록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루는 개양귀비꽃이라는 제목의 그림 중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은 모네의 부인 카미유와 그의 큰아들 장이다. 이 그림의 이미지는 유명세를 탄다. 기존 그림들과 너무도 달랐던 점 때문에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아르장퇴유는 노르망디의, 그리고 센 강이 지나가는 조그마한 도시입니다. 모네는 주말이면 이곳으로 나가 가족들과 산책을 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는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던 기존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죠. 풍경화란 ‘역사적 사건’을 정해진 색과 구성을 맞춰 그리는 경우가 많았고, 이렇게 형태를 정확하지 않게 묘사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그림은 유명해집니다. 비난이 쏟아진 탓이죠. 도무지 완성작이라고 볼 수 없는 표현들은 사람들을 당혹시켰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때 모네가 선보인 또 다른 그림의 제목은 ‘해돋이의 인상’(마르모탕 미술관 소장)이다. 이 그림 역시 바깥에서 본 풍경에서 시작됐다. 이 작품이 바로 처음 발표된 1874년 이름 없던 전시회를 ‘인상주의자들’이라는 그 위대한 제목이 붙도록 했다.”
해가 돋는 장면을 짧은 순간만 잘라서 표현했다는 이 그림을 ‘그림’이라고 곱게 받아들일 평론가는 그 당시에 없었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그림으로 비난을 받았고, 이 그림을 두고 ‘곰팡이가 핀 벽지를 뜯어 붙였다’는 과도한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이들이 비난을 받을 당시에도 이 화가들을 부르는 명칭은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전시회 도록에 ‘무명작가 전시회’라고 붙였으니까요. 인상주의자라는 이름은 좀 뒤에 따라왔습니다.
“첫 전시회 카탈로그를 만들 때까지도 아직 정하지 않았던 그림의 제목을 출판사에서 묻자 모네는 ‘인상을 줘 보자’라고 대답하고 ‘인상? 해가 돋는’이라고 불러주었다. 이 우연한 제목은 좋지 않은 의도를 가졌던 비평가 루이 르로이의 손에서 되살아 왔다. 조롱하려는 의도로 ‘인상주의’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1876년 두 번째 이들의 전시회를 보고 그들을 후원하던 작가 에밀 졸라는 ‘이 화가들을 인상주의자라고 부르겠다. 그들은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대상들이 만들어 내는 공기의 흐름이 주는 인상을 묘사하려고 했고, 그 찰나의 인상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로드 모네가 이 그룹의 리더다. 그 찬란한 빛을 그의 붓이 보여줄 것이다’라고 했다.”
에밀 졸라의 선언을 따르듯 3차전시회부터 모네와 그의 동료들은 자랑스럽게 ‘인상주의자 전시회’라고 스스로의 작업과 그룹을 이름짓습니다. 밝고 생생한 색깔과 그 색깔을 과감하게 튀어오르도록 배열한 구성의 파격성, 그리고 완성되지 않은 듯 보이는 공간 사이에 채워넣은 공기의 흐름. 바로 그것은 주제의 선택과 표현,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혁신이었습니다.
그 혁신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예술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선사했다’는 찬사와 함께, 오늘날까지도 빛나는 색깔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미술사학자 안현배는 누구?
서양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예술사로 전공을 돌린 안현배씨는 파리1대학에서 예술사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예술품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태어나게 만든 이야기와 그들을 만든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라와 언어의 다양성과 역사의 복잡함 때문에 외면해 오던 그 이야기를 일반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