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비밀노트

입력 : 2017.12.19 16:31

2017년 1월부터 엄마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수필도, 짧은 동화도 종종 쓰긴 했지만, 본인이 살아온 솔직한 이야기를 써본 적은 없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의외로 큰 용기가 필요하다. 성장하면서 얻은 아픈 기억들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옅어지거나 잊혀지지 않는다.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살다보면 어느 순간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툭’ 하고 튀어나와서 현재의 내 삶을 흔들어 놓고 내 감정을 소용돌이치게 할 때가 있다.

치유되지 못한 내 과거의 상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내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더라도 ‘과거의 아픔’과 마주하고 화해를 시도해야만 한다. 오늘 내 삶이 온전히 행복할 수 있으려면 말이다.

마음속에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만나기 위해서 시작한, 68세 우리엄마의 자서전 쓰기는 2017년 1월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벌써 다섯 권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매서운 눈으로 늘 야단칠 일만 찾아내던 할머니. 나는 할머니 앞에만 서면 오줌을 쌀 것만 같은 불안함이 밀려왔다.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느라 얼굴이 늘 창백했던 우리엄마…. 엄마가 장사를 나가면, 나는 눈물을 목으로 삼키면서 언덕을 내려가는 엄마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소리 내어 울어선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다섯 살 때 이미 깨달아 버린 것 같다.”

60년이 지났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다. 다섯 살 영숙이는 엄마가 장터로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을 어귀에서 울었던 기억, 파란 하늘이 노을로 물들다가 검붉게 변해 가도록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던 그 자리. 거기 서서 온 몸으로 느꼈던 바람의 온도와 살에 닿던 느낌. 해가 있을 때의 바람 냄새와 저녁에 부는 바람 냄새가 어떻게 다른지, 노을의 색깔 변화까지 선명하게 글로 옮기고 있었다.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지 12개월째. 가끔 엄마의 노트를 훔쳐보는 밤이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엄마의 아픔 속으로 함께 들어가고, 어린 엄마를 안고 울기도 한다. 엄마의 글은 열 살의 한 장면에 멈추어 있었다. 이제 영숙이는 열 살이 돼서 안동에서 부산으로 전학을 왔더라. 부산 영도에서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물이 귀했던 영도 청학동에서의 삶은 매일 물과의 전쟁이었다. 열 살 영숙이는 처음으로 물동이를 이고 언덕을 오르내렸고, 우물가에 줄지어 선 아주머니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벌였다. 새치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째, 엄마는 한 자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아픈 영숙이와 마주하기가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아이와 만나고 울고 안아주면서 아이와 같이 성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68년 동안 혼자 울던 영숙이는 권정생의 동화 ‘몽실언니’ 못지않은, 슬프지만 사랑스러운 동화의 주인공이 돼 글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울음을 참느라 아랫 입술을 깨무는 것이 버릇이 됐던 과거의 아이는 이제야 실컷 울고, 위로받고, 68세가 된 미래의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이 진행 중이다.

가끔은 엄마가 “이건 한 번 읽어봐”라면 노트를 내민다. 나는 엄마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우리 영숙이 정말 잘 태어났네! 우리 영숙이 정말 잘 살아왔네…. 어쩜 이렇게 글도 잘 쓸까! ‘몽실언니’만큼 감동적이다.”

칭찬을 아끼지 않고 해주고 엄마를 안아준다. 영숙이는 이제 열 살이 됐으니까, 열 살의 표정으로 웃고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열 살의 목소리로 운다. 그러면서 평생을 자기 가슴속에 숨어서 울고 있던 어린아이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비워내기 시작하니까 웃음도 많아지고 자기마음도 표현하기 시작한다. 엄마는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와 상담을 하고 싶어도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 자체가 힘든 사람들이 많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깊은 사람들일수록 더 힘들다. 이제 와서 과거의 상처를 꺼내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만의 자서전 쓰기’를 권하고 싶다. 글로써 내가 나와 마주할 때, 내가 나를 이해하고 안아주고, ‘네 잘못이 아니야. 그동안 여기까지 잘살아 왔어. 너니까 여기까지 온 거야. 고생했어…’라고 말해 줄 때 얻는 위안은 타인이 줄 수 없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자기 스스로에게 노트 한 권을 선물해 보자.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조금씩 써 보는 것은 어떨까?

내 부모님도 어쩌면 이때까지 하지 못했던, 그러나 꼭 한 번은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한 평생 가슴속에 고여 있을지도 모른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한 권의 노트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박상미의 고민사전] 엄마의 비밀노트

‘마음치유 전문가’ 박상미는?

‘마음치유 전문가’로 불리는 박상미씨는 문화치유 교육센터 ‘더공감 마음학교’와 ㈜더공감 커뮤니케이션의 대표다. 경찰대학교 교양과정 교수로 있으며, 법무부 교화방송국에서 전국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영화치유 강의를 하고, 교도소와 소년원에서는 <문화치유학교>를 연다. 저서로는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 <마지막에는 사랑이 온다> 등이 있다. 고민상담은 skima1@hanmail.net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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