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이산하 지음, 노마드북스 펴냄
![[스경의 한 줄 책] 제주4.3의 진실을 폭로했던 장편서사시 '한라산' 복간](https://images.khan.co.kr/article/2018/04/06/l_2018040602000317200064241.jpg)
“한국현대사 앞에서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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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상복을 입고 40년만에 처음 찾은 한라산
내가 나를 운구하듯 걷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산등성이마다 뼛가루처럼 쌓여있는 흰 눈이며
나뭇가지마다 암호를 주고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삐라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도
깜짝 놀라 피했던 새가슴이며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오름과 무덤마다
자지러질 듯 반짝이는 별들이며
청보리 일렁이는 생가슴마다 차곡차곡 돌 쌓아
멀리 수장하러 배 떠났던 바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낙엽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그러나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도.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시’ 중에서
오랜 역사를 두고 구워진 숯덩이
오래고 오랜 역사를 통해
마를 대로 말랐다가 불붙은 숯덩이
불꽃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소 돼지 멱따듯이
다리 아래 개 도살하듯이
그렇게 때려죽이고 고문해 죽이고
찔러 죽이고 태워 죽이고 목 졸라 죽이고
생매장하고 차바퀴에 깔려 죽이고 목 졸라 질식시키고
바다와 하천에 돌을 단 채 수장시키며
죽이고 도 죽였건만
섬은 끝내 정복되지 않았다.
-‘항쟁의 불꽃’ 중에서
**저자 후기
지금은 비록 가슴에 폭탄 같은 시를 장착하고 불속으로 뛰어들었던 그 분노와 노여움은 사라졌지만,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천둥 같은 그리움만은 여전히 삼엄하고 여전히 장렬하다. <한라산> 이후 내 삶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운구하는 것 같은 삶이었다. 그리고 늘 진실만 말해야 한다는 멍에가 나를 30년이나 압박했고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마에 찍힌 천형이었다. 방식이 다를 뿐 시인은 마땅히 세상의 모든 악에 책임을 져야 하고 오래 슬퍼해야 한다. 길 끝이 보인다. 여울 같은 좁은 길. 짧게 슬플 시간도 없지만 길게 아프지 않을 이유도 없다. (중략)
거듭 말하노니
한국현대사 앞에서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