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지음, 민음사 펴냄
“한 사람에게 어떤 운동 하나가
삶의 중심 어딘가에 들어온다는 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일이다.
몸의 자세가 달라지고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고
몸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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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들 몇 십 년 동안 축구광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며 축구를 해야겠다는 열망에 휩싸였다든가, 삶이 공허하고 힘겨웠던 어느 날 길을 걷다 어딘가에서 굴러온 축구공을 무심결에 툭 찼는데 발끝에서 전해지는 짜릿한 전율에 힘이 샘솟으며 ‘그래, 다시 한 번 제대로 살아 보자!’라는 희망이 솟구쳤다든가, 그런 비장한 이유로 축구를 시작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 ‘그냥 얼결에(모두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얼결에!)) 아무 운동이나 하게 됐는데 그게 축구였네’라니. 아, 평범해. 아, 시시해! -42쪽
주장이 공을 몰고 가서 멈춰선 곳은 남자 2호 앞이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공을 가진 사람이 앞에 섰으니 영문을 신경 쓸 때는 아니라, 어쨌든 잽싸게 수비 자세를 취한 남자 2호. 공을 잠시 끌던 주장은 왼쪽으로 돌파할 것처럼 몸을 확 기울였고, 남자 2호가 그 동작에 반응하는 찰나 반대쪽으로 공을 몰고 쉭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다. 와아아아! 맥없이 제쳐진 남자 2호가 역동작에 걸려 엉거주춤 무릎이 꺾이는 것과 동시에 내 입에서 저절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선출들은 꼭 한 번 꺾어도 충분할 걸 두 번 꺾는다고 뭐라고 하더니 그래, 당신은 정말 한 번 꺾어도 충분하네! 아, 쌤통이다. 아, 짜릿해! 옆에서 언니들도 신나서 외쳤다. “은진아, 달려! 달려!” (…) 대단한 후반 20분이었다. 우리 모두를 소리 지르게 만든 통쾌한 20분이었다. 내 마음속에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여 있었을 맨스플레인 독을 일부나마 빼내어 준 것 같은 20분이었고, 그래서 어쩌지 한바탕 울고 난 것 같은 후련한 20분이었고, 나를 다시 한번 축구와사랑에 빠지게 만든 20분이었다. -59~60쪽
꽤 오랜 세월 내가 내 몸에게 바랐던 건 ‘건강’보다는 ‘아름다움’쪽이었다. 꽤나 팔팔했던 20대의 나에게 건강이란 너무나 막연한 대상이었고, 아름다움은 즉각 눈에 보였다.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족쇄라는 것을 알면서도 족쇄의 갑갑함보다는 족쇄의 아름다움에 더 매료됐다. (…) 헤어날 길 없어 보이던 이 블랙홀에서 조금씩 벗어난 건 30대 문턱을 넘어서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넘다가 문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체력과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는데 반년 넘게, 다시는 이렇게 아프고 싶지 않을 만큼 크게 아팠다. (…)‘수술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 앞에서 ‘핏 좋은 몸매’만 그렇게 좋아하다가 좋은 핏으로 수의를 입으면 뭐하나 싶었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이 좋고, 못 먹고 죽은 귀신은 핏이 좋다? 아이고 다 부질없다. 다 핏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154쪽
한동안 축구장에 나가지 못했다. A형 독감에 걸린 것이다. (…) 나는 결석을 알리는 글을 남기기에 앞서 잠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처럼 축구화 끈이나 겨우 묶을 줄 아는 선수의 결장이 팀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은 묶은 축구화 끈이 풀어지면서 내는 소리보다도 더 희미하고도 미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 “A형 독감에 걸려 이번 주 경기에 불참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첫 문장을 써놓고 잠시 고민했다. 살다 보면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해서 미안한 경우도 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미안한 경우도 있다. 인생이 참 쉽지가 않다. 결국 끝까지 “죄송합니다”라고 쓰지 못하고, 대신 “모두들 모쪼록 감기 조심하세요.”라는 무난한 인사로 마무리했다. (…)새삼 깨달았다. 자신의 부재를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강자라는 것을. 미안할 수 없는, 누구도 그 미안함이 필요 없는 입장도 어딘가에는 늘 있으니까.-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