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가 없는 나라> 이정희 지음, 동아시아 펴냄
![[스경의 한 줄 책] '짱깨'라 배척한 137년, 그 불편한 진실과 반성 '화교가 없는 나라'](https://images.khan.co.kr/article/2018/11/11/l_2018111102000498200098981.jpg)
“노화교는 일본처럼 공립학교와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다.
변호사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도 없다.
한국인과 똑같이 세금을 내고 있는데도 각종 복지혜택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
■짱깨·짱꼴라? 명동성당·약현성당이 화교 손으로 지어졌다
“짜장면과 우동 등 중화요리가 우리의 생활 속에 스며든 것은 해방 이후다. 변변한 외식이 없던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화요리점은 최고의 외식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화교 경영 중화요리점은 1960년대 말 전국에 약 2400개에 달해 화교의 70퍼센트가 이 직종에 종사했다.” -45쪽
화교 삼도업(三刀業) 가운데 중화요리업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화교 경영의 양복점과 이발소는 생소할 것이다. 양복점과 이발소는 중화요리점과 달리 일제강점기 때 융성하였지만 점차 쇠퇴하여 해방 후에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1930년대 경성에서 양복점 기사로 활동한 조선인 최준은 화교양복점의 기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봉제 솜씨가 뛰어났는데, 재봉틀을 쓰지 않고 손바느질로 양복을 만들었으며, 양복의 조제 시 자리 잡음과 착장감을 잘 살려 기술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다.”-57쪽
한국인이 중국인을 비하할 때 종종 사용하는 ‘짱깨’ 혹은 ‘짱개’는 바로 지배인을 뜻하는 ‘장궤’에서 유래된 것이다. 주단포목상점의 종업원들이 지배인을 중국어로 ‘장구이’라고 부르는 것을 조선인이 듣고 ‘짱깨’로 와전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또 짱깨와 함께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는 ‘짱꼴라’라는 일본어의 ‘장코로’에서 온 속어이다. 일본이 대만을 식민통치할 때 한족 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로 ‘장코로(淸國奴)’라 불렀는데 일본인에 의해 조선에도 전해져서 조선인이 발음하기 편한 ‘짱꼴라’로 변형된 것이다. -72쪽
“서울 명동성당과 약현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북 전주 전동성당, 대구 계산성당, 전북 익산 나바위성당… 이들 성당과 가톨릭 관련 건축물은 한국의 주요한 근대유산으로 가톨릭 신자는 물론 일반인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설계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에 온 외국인 선교사가 했다. 그러나 성당건축이 완성되려면 훌륭한 설계도면만 있어서는 안 된다. … 이 건축물들은 화교 건축기술자가 직간접적으로 참가해 시공했다. 화공은 벽돌조적과 석공 기술이 조선인이나 일본인보다 우수했다. ”(88~89쪽) 화교 건축회사와 직공이 가톨릭 건축물만 시공한 것은 아니었다. 안동교회, 서울 승동교회, 평양 숭실전문학교, 서울 YMCA회관, 서울 새문안교회, 경성성서학원, 이화학당 프라이홀, 조선기독교서회, 이화여전 신촌교사 음악당 대강당, 조선일보사옥, 안동교회 석조예배당 등을 시공했다.(94쪽)
화농(華農)은 채소재배에서도 조선농가나 일본인보다 비교우위를 보여 주요 도시에 채소를 독점적으로 공급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유기비료를 풍부하게 썼으며, 집약적으로 다양한 채소를 재배했다. 재배기술도 뛰어났다.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다우치 미치토시는 “경지에 대한 그들의 노동의 끈기는 도저히 일본인과 조선인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며 가족 전원은 일출과 함께 기상하여 일몰 때까지 야외작업에 종사한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107쪽
■한국화교에 대한 차별, 불편한 진실들
세계 화교 가운데 한반도화교처럼 거주국에 뿌리내리지 못한 화교도 드물다. 老화교 인구는 남북한 합쳐 2만3000여명에 불과하다. 이들의 경제력은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로 야유당할 정도로 취약하다. 1930년까지만 해도 조선화교의 경제력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압박할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했는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추락한 것일까?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2년 6월 집계한 1931년 화교배척사건의 피해상황은 1927년 사건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화교 사망자가 119명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평양부가 96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폭행협박, 방화, 투석기물파손, 호떡비 미지불 도망, 채소약탈 등 그 형태는 다양했다. -199쪽
“화교를 비롯한 외국인의 토지 취득 상한제는 1999년 ‘외국인토지취득과 관리에 관한 법률’ 공포로 철폐되었다. 화교를 위한 조치라기 보다 IMF 경제위기로 외국인 자본 유치를 위한 한국의 필요에 따라 실시한 것이었다. …화교에 대한 거주허가 기간은 1995년에 5년으로 연장하고, 2002년에 영주권이 부여되면서 (거주 자격)신고의 의무는 사라졌다. 영주권을 보유한 화교는 2005년 ‘영주외국인에 대한 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 법안’에 따라 지방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화교의 지방참정권 부여는 화교의 법적권리를 신장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재일한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205~207쪽
“한국의 노화교의 법적 지위는 재일한국인과 비교할 때 어떨까? 노화교는 일본처럼 공립학교와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으며 변호사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도 없다. 한국인과 똑같이 세금을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각종 복지혜택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아동수당의 대상에서도 노화교는 제외되어 있다. 국백령 한성화교협회 고문은 노화교의 영주권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구하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그는 ‘우리들이 그동안 소지하고 있었던 것은 중화민국(대만) 여권이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외국인 등록상 우리들의 국적은 ‘CHINA TAIWAN’이다. 중화민국이 아니고, 중화인민공화국도 아니다. 그래서 한국화교는 스스로 ‘나라 없는 난민’이라 자조한다.” -210~2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