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의 아픔이, 슬픔이 우리의 노래로 여러분의 노래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오히려 그 노래를 지켜주신 것은 여러분입니다.”
1998년 발매된 가수 정태춘 박은옥 9집 <정동진/ 건너간다>에 수록된 ‘수진리의 강’을 부르던 박은옥은 무대 옆에 고이 접어두었던 편지를 꺼내들고 막바지 후주 부분에서 관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했다. 40년의 세월을 물론 한 단어로 함축하기엔 굉장히 어렵다. 결국 수많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뒤로 하고 이들이 꺼낸 말은 결국 ‘여러분이 있었기에 이 노래가 있었다’는 가수에 대한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생각하는 가수, 행동하는 가수 그에 앞서 ‘부부가수’로 유명한 정태춘과 박은옥이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열었다. ‘날자, 오리배’라는 소제목으로 명명된 이번 공연은 지난달 13일과 14일 제주 공연을 시작으로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로 자리를 옮겨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7일까지 관객을 만나고 있다. 1978년 각각 같은 소속사인 서라벌레코드에서 데뷔 앨범을 낸 두 사람은 1980년 결혼한 이후 햇수로 40년째 함께 노래를 불러오고 있다. 음악, 미술, 영화, 사진, 문학, 언론, 학계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인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은 이들의 활동 40년 음악사적, 사회적 의미를 조망하기 위해 공연, 음반, 포럼 등을 2019년 한 해 내내 진행한다.
공연은 이 프로젝트의 선두에 서 이들의 40년 음악인생을 조명하고 있다. ‘날자, 오리배’라는 다소 이색적인 제목도 다 살펴보면 의미가 있었다. 2012년 이들이 낸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에서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한 곡의 제목으로 비자도 국적도 없이 바이칼 호수, 에게해, 탕가니카, 티티카카 호수로 가는 오리배를 타고 대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이들의 열망이 전국을 도는 원동력이 됐다. 인터미션을 포함한 두 시간 반의 공연은 이들의 초기 노래부터 신곡까지 총 18곡이 망라된 성찬이었다.
시작은 1978년 각각 정태춘과 박은옥의 이름으로 나온 1집에서 시작됐다. 정태춘은 ‘서해에서’ ‘촛불’을 불렀고, 박은옥은 ‘회상’과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의 주제가로 유명한 ‘윙윙윙’을 불렀다. 11집 수록곡 ‘꿈꾸는 여행자’로 이어진 공연은 40주년 기념앨범 수록곡 ‘연남, 봄 날’로 이어졌고 9집 수록곡 ‘5.18’의 클라이맥스로 올라갔다. 이 노래는 1995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광주 비엔날레가 진행될 당시 진보적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안티 비엔날레’ 움직임이 일어났을 때 정태춘이 ‘잊지않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가져갔던 노래였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재현하는 가사와 붉은 꽃을 상징하는 강렬한 색감 그리고 명창의 창이 등장하는 처연한 구성이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실질적인 2부에서는 두 사람의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 엿보였다. 전통가요 즉 트로트의 작법이 두드러지는 ‘양단 몇 마름’과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연상시키는 8분짜리 대곡 ‘정동진3’ 그리고 바리톤 박정섭과 함께 부른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등이 색다른 구성으로 눈길을 모았다. 모든 노래가 끝난 이후에는 이들의 대표적인 히트곡 ‘사랑하는 이에게’가 자막과 함께 등장했다. 30대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60~70대 이르기까지 이들의 정서에 호흡해왔던 모든 관객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공연은 시종일관 정숙하고 간결하게 진행됐지만 다소 쑥쓰러워하고 어눌하면서도 노래를 진정성있게 소개하는 정태춘의 모습과 라디오 DJ 뺨을 치는 언변과 재치로 남편을 재치있게 골려주는 박은옥의 모습이 이 부부의 40년 호흡을 증명했다. 이들은 40주년을 맞아 중간중간 포스트잇으로 붙인 이들에 대한 소회나 감상을 대신 읽어주면서 직접 싸인 CD 선물을 건네는 등 아이돌 가수 팬미팅에서나 하던 이벤트를 하며 많은 관객들의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1978년에서 시작하고 1985년에 갔다가 1998년에 가고 2002년에 갔다가 2012년에 가는, 그리고 결국 2019년에 도착하는 이들의 여정은 결국 이들의 노래를 소중히 해왔던 팬들을 위한 여정이었다. 이들은 직접 마지막 노래 ‘수진리의 강’에 박은옥의 목소리로 감사를 전했고 앵콜곡 중간에도 다시 정태춘의 거푸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많은 관객들을 기립박수치게 했다. 공연 내내 한 번도 노래를 함께 하지 않던 이들이 서로의 노래에 조금씩 화음을 넣고 결국에는 앵콜곡에서 노래를 정겹게 나누는 모습은 팬들에게 끓어오르는 사랑을 표현하기엔 어색하지만 그렇게 40년을 익혀왔던 숙성된 성숙한 사랑의 표현을 하기에는 모자라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앵콜 때 인사를 하기 위해 두 손을 잡는 모습은 어쩌면 숭고하기까지 하다.
오리배를 탄 정태춘과 박은옥은 오는 10~11일 부산, 18일 전주, 25일 창원을 비롯해 다음달에는 강릉, 양산, 대전, 이후에는 성남과 인천을 도는 전국투어를 계획 중이다. 이들의 정갈한 무대는 젊은 가수들의 그것 같은 현란함은 없다. 하지만 공연을 마친 후 가슴을 뿌듯하게 채워오는 포만감에 있어서는 부러울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