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여행이란 무엇인가? ‘남미 히피 로드 - 800일간의 남미방랑’

입력 : 2019.05.09 17:09

바쁘냐. 나도 바쁘다. 바쁘니까 봄이지. 벚꽃 지고 사과꽃이 필랑말랑 꽃대를 내밀었으니 사흘이면 만개하겠지. 농부된 처지여서 꽃 싫다 못하지만 꽃은 다 일거리. 알알이 맺히면 솎아주는 적과작업만 열흘. 사과뿐이랴. 하우스 고추도 심어야 하고 상호네 못자리 만드는 일도 거들어야 하는데….

감자를 심느라 한달을 끙끙거렸지. 저녁 먹고 쓰러졌다 일어나면 캄캄한 밤.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앉았다가 본질을 물으라던 어느 교수의 말을 떠올리곤 혼자 웃었다. ‘바쁨이란 무엇인가’ ‘봄이란 무엇인가’….

그러게. 나는 왜 바쁘지? 뭣 때문에? 어디다 쓰려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라는 답은 너무 슬프니까 제외. 생이 오로지 일하고 돈 벌고 먹고 자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얼마나 남루한 것이랴. 저렇듯 캄캄한 새벽.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동안 생각하는 거지. 사과꽃 지고 나면, 고추만 다 심고 나면, 떠나야지. 봄의 제주는 어떨까. 라오스는 건기일까. 이름조차 몽환적인 곳. 제리코아코아라를 가고 싶어라.

[서평] 여행이란 무엇인가? ‘남미 히피 로드 - 800일간의 남미방랑’

신문에 연재되는 동안 일부러 찾아 읽었지. 남미여행. 작가 노동효. 남아메리카 대륙을 2년 넘게 떠돌며 여행기를 써왔지. 이 작가에게 여행은 내가 사과농사를 짓거나 고추농사를 짓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자 직업. 남미뿐 아니라 2~3년 주기로 대륙을 옮겨 다니며 여행하는, 지구가 고향인 방랑자.

본업이 여행인 작가의 여행기야말로 내 영농일지이거나 교사의 교무수첩 같은 것일 텐데 나는 왜 일부러 찾아 읽었던 것일까. ‘론니 플래닛’ 같은 가이드북조차 구태의연해서 그저 검색 한 번으로 정보를 얻고 클릭 한 번으로 비행기며 숙소가 예약되는 시대에 굳이 아끼며 찾아 읽던 여행기는 뭐였지.

‘제리코아코아라’라는 이름의 지명을 알사탕처럼 빨아먹다가 알아버렸다. 이 작가도 본질을 묻는구나. ‘여행이란 무엇인가’

[서평] 여행이란 무엇인가? ‘남미 히피 로드 - 800일간의 남미방랑’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 브라질, 쿠바. 멀고도 아득한 나라의 국경을 굳이 20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넘으면서 작가는 묻는다. ‘길이란 무엇인가?’ 마추픽추에 오르고 아레키파의 도미토리에서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안데스 산맥에서 레인보 패밀리를 만나 노래하고 춤추며 묻는다. ‘집이란 무엇인가?’

[서평] 여행이란 무엇인가? ‘남미 히피 로드 - 800일간의 남미방랑’

체 게바라가 잡히고 처형당한 볼리비아의 작은 마을을 작가가 굳이 찾았을 땐 내가 먼저 물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해커로 살아가는 21세기형 집시에게 고향이 없는 삶이란 어떤 건지 나 대신 물어주었다. 에콰도르에서 강도를 만나 빈털터리가 되고 그 때문에 만난 히피들과 서커스를 하며 떠돌 때는 ‘방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 저글링을 하며 아이들을 웃긴다.

그리하여 대서양에서 해가 뜨고 안데스 산맥으로 해가 지는 모든 남미의 길들을 천천히 걸으면서 작가는 묻는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은 계란이지. 작가의 서커스 친구 파블로라면 이렇게 답했을 테지. 작가는 히피들로 이루어진 국제서커스단의 일원이 돼 ‘하루 동안 번 동전으로 여관비를 내고, 시장상인들이 준 갖은 식재료로 저녁밥을 지어 먹으며’ 떠돈다. ‘포파얀, 빌카밤바, 암바토, 바뇨스, 오타발로. 에콰도르의 도시’를 떠돌다가 ‘조선시대 사당패나 광대패의 삶’을 떠올리며 말한다. ‘삶은 여행이자 축제다!’

왜 아니겠나. 그렇지 않다면 저 환한 자두꽃을 보다가, 저 노란 배추꽃을 보는 것으로도 와락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우루과이의 해변도시 카보폴로니오를 떠올리는 것으로도 감자밭 풀 뽑는 일이 덜 지겨운 것은 삶은 원래 정주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서평] 여행이란 무엇인가? ‘남미 히피 로드 - 800일간의 남미방랑’

그리고 제리코아코아라. 브라질의 북동쪽. 비행기에서 내려 7시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해변마을. 아무것도 없다는 모래마을. 그런 곳들이 있다. 가 보지 않아도, 가볼 수 없어도, 가보면 정작 후회만 안고 오더라도, 언제고 가야지 마음먹는 것만으로 일상의 위안이 되는 이상향. 별빛과 파도소리만으로도 넉넉할 테지. 자꾸자꾸 입 안에서 굴려보는 아름다운 이름들. 파타고니아, 우수아이아 그리고 제리코아코아라.

사과꽃이 피면, 사과꽃이 지면, 감자꽃이 피면, 감자꽃이 지면. 혹은 세상의 모든 꽃들이 피거나 지더라도 나는 어쩌면 꼼짝없이 농사를 짓느라 이 골짜기에 갇혀 있을지 모르지. 그렇더라도 태평양이 저 아래로 보이는 발파라이소 언덕의 5층짜리 집을 상상할 수는 있지. 막 부풀어 오르는 아카시아 꽃뭉치 아래 가만히 앉아 상상하는 것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지. 가이드는 노동효.

[서평] 여행이란 무엇인가? ‘남미 히피 로드 - 800일간의 남미방랑’

발파라이소 언덕 5층 꼭대기 방에 가면 ‘지구라는 거대한 배의 선장실 같다’는 서재가 있다지. ‘커다란 창이 삼면으로 나 있고, 정면으로는 활시위를 당긴 듯 둥그런 수평선이 활짝 펼쳐져 있는’ 파블로 네루다의 서재. ‘하늘은 맑고 바다는 파래서’ 작가는 금방이라도 시인의 음성이 들릴 것 같다지. 그런데 희한하지. 내게도 들린다. 네루다의 음성이. 마침 날은 다 밝아서 저 바쁜 봄의 들판으로 나가야 하는데, 희한하지. 자꾸 태평양의 파도소리가 들린다.

“자, 닻을 올리고 출발!”

덧 1. 이 책에는 쿠바여행의 비밀과 그 비밀을 푸는 기막힌 방법이 숨겨져 있다. 쿠바를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두기를….

덧 2. 남미의 나라와 도시들이 챕터마다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우루과이, 에콰도르, 파라과이가 대륙의 어디쯤 붙어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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