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 사진제공|후크엔터테인먼트
나이 일흔네살에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섰다.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영화관계자들이 그의 여우조연상 수상 장면에 박수로 축하했다. “난 대배우가 아니라 그냥 노배우”라며 거창한 수식어에 손사례쳤지만, 누구나 다 인정하는 ‘대배우’로 거듭난 순간이다.
윤여정의 인생은 한편의 영화 같았다. 1966년 TBC 공채탤런트로 데뷔한 이후 고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1971)로 이름을 크게 알리며 그해 대종상,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었다. 스타 탄생의 신호탄이었다.
영화 ‘화녀’ 속 윤여정.사진제공|(주)디자인소프트
그러나 윤여정은 1975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을 택했다. 출산과 육아로 미국에서 공백기를 가진 그는 배우로서 활동을 이어가기 보다는 두 아들들의 엄마로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연기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건 결혼 13년 만에 조영남과 파경하면서부터다.
“두 아들들이 일하라고 종용한다. 그 잔소리 덕분에 열심히 연기했고, 이 자리에 서게 됐다”는 그의 소감은 과장된 게 아니었다. 이혼에 대한 당시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이었던 탓에 방송 출연은 쉽지 않았다. 한때는 “이혼녀를 출연시키지 말라”는 시청자 항의가 쏟아지기도 했다.
가수 조영남과 결혼 이후 윤여정. 사진|경향DB
컴백작은 박철수 감독의 영화 ‘어미’였다. 당시 시나리오를 쓴 김수현 작가와 인연을 이어간 그는 작품이나 배역의 크기를 가리지않고 소위 ‘들어오면 출연한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로 연기파 배우라는 수식어를 얻었고, 김수현, 노희경 작가들의 ‘페르소나’로 활약하기도 했다.
생계형 배우였기 때문에 늘 연기에 절박했다. 과거 ‘스포츠경향’과 인터뷰에선 ‘천생 배우’라는 칭찬을 한사코 물리며 “즉석에서 연기를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런 배우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한 마디도 500가지 뉘앙스로 연습했을 정도다. 내 느낌을 자유자재로 전달하려면 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대사가 완벽하지 못하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거고, 까다롭다는 이미지가 생겼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혼 후 연예계로 복귀한 윤여정. 사진|경향DB
그런 그의 절박함은 캐릭터 스펙트럼까지 넓히게 했다. 특히 2003년 임상수 감독 ‘바람난 가족’에선 공개적으로 불륜을 선언하는 시어머니 ‘홍병한’으로 분해 충격을 줬고, ‘그때 그 사람들’ ‘하녀’ ‘돈의 맛’ ‘죽여주는 여자’ 등 출연작마다 강렬한 존재감을 남기며 ‘윤여정’이란 이름 석자에 신뢰감을 쌓았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가 인기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솔직함’ 때문이었다. 대부분 중년 배우들이 노출신을 문제로 ‘바람난 가족’을 거절했을 때에도 집 인테리어 비용을 대기 위해 수락했다며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제일 연기를 잘한다. 예술가도 배고프고 돈이 급할 때 좋은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예술이 잔인한 것”이라고 말한 그의 어록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속 윤여정.
도전정신도 윤여정의 힘이었다. “이미숙이 ‘70대에 4차원인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전형적인 엄마, 할머니 역을 맡는 대신 이미지에 반대되는 파격적인 작품과 캐릭터에 도전하길 즐겼다. ‘미나리’ 역시 미국 독립영화이고 해외 로케이션 진행이란 부담이 컸지만, 시나리오와 정이삭 감독의 진정성에 반해 흔쾌히 출연했다. 이 대목만 봐도 그에게 ‘한국 최초 오스카 수상자’란 타이틀이 주어진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영어를 못해 해외러브콜이 올 일 없다”는 그의 여유에 또 어떤 황금빛 미래가 펼쳐질지 앞으로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