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문보경이 출루 뒤 김호 1루 코치와 주먹을 맞대고 있다. LG 트윈스 제공
마치 지독한 수련을 마치고 하산하는 무사처럼. 그날 LG 문보경(21)의 인사가 그랬다.
1군행 호출를 받고 지난 1일 대구 삼성전에 합류하기에 앞서 2군 감독과 면담 자리. 문보경은 황병일 LG 2군 감독이 건넨 1군 관련 조언을 하나씩 챙겨들은 뒤 특유의 덤덤한 표정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네, 감독님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이제 여기(2군) 다시는 안올겁니다. 감독님 다시 안뵐겁니다.”
혹여라도 “(1군에)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기다리는 2군 감독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다시는 2군 감독 얼굴 안볼 것”이라는 당돌한 인사에는 경력 30년의 초베테랑 지도자조차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병일 2군 감독은 문보경을 두고 “그냥 보면 능글능글한 4차원이나 만만디 같지만, 타석에서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면 어떤 선수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어떤 투수를 만나도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 선수”라며 “어린 나이에도 매타석 나름의 계산 속에 자기 공을 만들어 친다”고 전했다.
문보경은 올시즌 퓨처스리그에서 타율 0.464(56타수 26안타)로 리딩히터로 독주하던 중 1군행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문보경이 1군으로 올라온 여러 신인급 야수 가운데서도 출전 빈도가 가장 높은 것은 드러난 성적 때문만은 아니다.
문보경은 일상의 ‘말’ 또는 ‘행동’으로 알게 모르게 코칭스태프 내 주목도를 높이고 있다.
이달 초에는 “어려서 선배들한테 안된다는 생각은 없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해서만은 안되고 잘 해야한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한 매체와 했다. 선수 인터뷰 같은 야구 콘텐츠를 팬들만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구단과 팀내 관계자들도 문구 하나 하나를 관심 있게 보기 마련인데, 현장의 수장인 류지현 LG 감독 또한 문보경의 당참을 읽고 은근히 흐뭇해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사실, LG가 2000년대 이후 오랜 세월 ‘유망주의 무덤’으로 악명 높았던 건 어린 선수들이 생존 경쟁에서 버텨내는 문화가 ‘옆집’ 두산 만큼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 이틀의 깜짝 활약으로 반짝했다가 안팎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내 사라진 별들이 많았다. LG를 떠나 뒤늦게 잠재력을 폭발한 선수도 많았다.
문보경의 언행은, 똘똘한 야수가 줄기차게 나오던 그 시절의 두산에서 자주 보던 선수들을 떠올리게 한다.
대한민국 양궁대표팀처럼 내부 주전 경쟁이 더 심하던 시절, 두산 야수들의 인터뷰는 결이 조금 달랐다. 인터뷰가 또 다른 메시지로 감독에게 또는 코치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듯한 뉘앙스의 코멘트가 유난히 많았다. ‘쓰임’을 받기 위한 진심을 애써 전하려 했다.
이번 시즌 SSG로 이적한 최주환은 내야 백업 또는 대타로 주로 나서던 그 즈음, 인터뷰 중 묻지도 않은 수비 얘기를 적극적으로 꺼내기도 했다. 일례로 수비시 첫 발을 떼는 속도를 올리려 개인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이는 다분히 감독의 귀를 향하는 메시지였다. 타격 경쟁력이 있던 최주환은 출전 기회를 늘리려면 수비력으로 인정받아야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이를 틈만 나면 어필하려 했다.
생애 첫 1군을 경험하고 있는 문보경이 황병일 2군 감독을 언제 다시 만날 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2군에 다시 안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것을 말로 뱉는 자신감만으로도 문보경은 이미 코칭스태프의 마음을 사는데 이미 절반은 성공했다.
문보경의 향후 레이스로 또 하나 관심을 끌 만한 지점이 있다. 비로소 선순환 흐름을 탄 LG의 유망주 성장 문화가 문보경으로 인해 제대로 힘을 받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