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데스파이네는 등판 다음날은 예외 없이 경기장 스탠드 계단을 오른다. 다음 등판을 위한 루틴의 시작이다.
지난해를 끝으로 은퇴한 뒤 방송인으로 활동 중인 박용택 KBS N 스포츠 해설위원은 선수 생활의 말미에 가장 힘들었던 점을 ‘일상생활’에서 찾았다. 밖에서는 나이 마흔 줄에 접어든 타자의 기본 체력과 스윙 스피드를 주목했지만, 박 위원이 보다 크게 느낀 어려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박 위원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제 경우는 심적으로 조금 지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누구라도 20년 가까이 프로 선수 생활을 했다는 건 그 기간만큼 일상에서 자기 관리를 엄하게 하고 살았다는 것을 설명한다”며 “나 또한 그런 부분이 살짝 힘들어진 시기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 위원은 지난겨울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점심 식사 중 반주로 마시는 맥주 한잔이 이렇게 즐거운지 또 몰랐다고 했다. 매일 저녁 6시30분 경기를 위해 거의 같은 루틴(일련의 과정)으로 하루를 보내던 박 위원에게는 꿈꾸기 어려웠던 ‘파격의 점심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4일 KT 외국인투수 오드리사머 데스파이네가 수원 롯데전에서 3.2이닝 동안 4안타(1홈런) 5사사구 5실점(3자책)의 부진한 피칭을 한 뒤 그의 루틴이 다시 한번 이슈가 됐다.
데스파이네는 대부분 선발투수들이 꺼리는 ‘4일 휴식 뒤 5일째 등판’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내왔다. 공교롭게도 ‘5일 휴식 6일째 등판’이던 롯데전에서 최악의 결과가 나오자 그의 몸에 내재된 ‘루틴’이 도마에 올랐다.
다음 등판까지는 ‘월요일 휴일’이 끼어있던 관계로 다시 5일 휴식 뒤 등판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선발 등판이 예고됐던 10일 문학 SSG전이 비로 취소되면서 변수가 발생했다. 이강철 KT 감독은 미팅을 통해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예 더 쉬고 등판해보는 게 좋겠다”며 내친김에 데스파이네의 루틴에 더 큰 변화를 줬다. 등판일을 이틀 더 미뤄 7일 휴식 뒤 지난 12일 수원 한화전을 데스파이네에게 맡겼다. 데스파이네는 또 긴 휴식 여파인지 6이닝 동안 사사구를 6개나 내줬지만, 삼진 9개를 낚아내며 4안타 1실점으로 자기 임무를 완수했다.
데스파이네의 휴식일 징크스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크다. KT 유니폼을 입은 지난해 이후로 4일을 쉬고 선발 등판한 31경기에서는 18승6패 평균자책 3.06을 기록한 데스파이네는 5일을 쉬고 나온 12경기에서는 2승5패 평균자책 6.25로 너무도 부진했다. 오히려 지난 주말 한화전처럼 6일 이상을 쉬고 나온 3경기에선 1승1패 평균자책 3.00으로 나은 성적을 거뒀다.
데스파이네는 같은 질문에 “가급적 4일 쉬고 나오는 게 나한테 맞지만, 5일 휴식이든 6일 휴식이든 상관 없다”고 매번 같은 대답을 한다. 그러나 등판 결과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
KT는 6월의 잔여 레이스에서 19일과 30일 등 두 차례 더블헤더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이 같은 ‘지옥 일정’이 데스파이네에게는 ‘천국’에 오르는 계단이 될 수 있다. 빡빡한 경기 일정으로, 데스파이네는 당분간 4일 휴식 등판이 가능하다.
사실 올시즌 생활 리듬이 가장 심하게 흔들린 선수는 추신수(SSG)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면 남보다 일찍 경기장에 나가 개인훈련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KBO리그 첫해인 올시즌은 원정경기 때 따로 택시를 이용해 서둘러 경기장을 찾아도 할 수 있는 훈련 여건이 되지 않았다. 추신수는 시즌을 치르며 KBO리그의 부족한 인프라에도 적응하고 있다. SSG 관계자는 “종종 원정 때도 경기장에 일찍 나가는데, 그럴 때도 기술훈련을 할 상황은 되지 않아 러닝을 하는 정도”라고 전했다. 추신수는 어느새 KBO리그식 생활의 리듬에 몸을 맞춰가고 있다.
야구 통계학의 또 다른 이름인 세이버 매트릭스의 보편화와 선수의 작은 움직임까지 수치화하는 트래킹 데이터의 발전으로, 야구 역시 과학의 한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상식과 과학으로 진단되지 않는 결과들이 많다.
프로야구는 일상의 경기다. 특성상 ‘루틴’이 확실하고, 그걸 또 의식하는 선수도 많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리듬이 경기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생활에서 발견하고 경험으로 해결할 것들이 지금도 참 많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