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임은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주방과 안방을 들락거렸다. 가스레인지에 국 냄비를 올려놓고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냈다. 세라는 물을 마시며 분주한 정임을 지켜봤다.
“엄마, 어디가?”
세라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머리 좀 묶으라니까.”
정임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주우며 세라에게 잔소리했다. 세라는 입꼬리를 쌜룩대더니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어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딸려 나왔다. 침대 머리맡에도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고무줄로 세 번 정도 감기던 머리숱이 두 번이면 충분했다. 한 주먹도 안되는 꽁지머리를 매만졌다.
정임이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세라는 거실 베란다로 가서 빌라 현관을 빠져나가는 정임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엄마! 어디 가냐고.”
정임은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빨간색 점퍼를 입고 걸어가는 정임의 등에서 앙증맞은 배낭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세라는 맞은 편에서 정임과 똑같은 빨간색 점퍼를 입은 슈퍼 아줌마를 발견했다.
‘아! 맞다.’
며칠 전에 남대문시장에서 샀다며 알록달록한 라운드 티셔츠를 얼굴에 대보던 정임의 표정이 떠올랐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단풍 구경을 간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슈퍼 아줌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늘어놓았었다.
두 사람이 남대문 갈치 조림 식당에 갔을 때였다. 슈퍼 아줌마가 밥 생각이 없다며 뒤로 물러앉았다가 갈치 조림이 나오자 참빗 모양의 가시만 발라 놓고 전부 먹어 치웠다고 했다. 어느 날은 정임의 얼굴에 난 평편사마귀를 보고 나이 들면 자연스레 생기는 거라면서 자신은 피부과에서 점을 싹 빼고 나타났다. 정임은 지난 일을 회상하며 음흉한 여편네라며 침을 튀기며 말했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도 잊어버린 듯 정임은 슈퍼 아줌마와 팔짱을 끼고 길 건너에 서 있는 관광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세라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쫓아 내려갈까 하다가 멀어져 가는 정임의 뒷모습만 멍하니 내려다봤다.
식탁 위에는 정임이 새벽부터 애쓴 흔적이 가득했다. 세라는 어제 먹은 걸 게워냈더니 속이 허했다. 장조림에 넣은 메추리알을 손으로 골라 먹으며 영양제를 챙겼다. 국이 끓는 동안 밀물처럼 다가오는 어제의 기억 때문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강호가 그처럼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부인과 의사는 혈중난포자극 호르몬이 기준치 이상으로 높게 나왔다며 조기 폐경이란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무월경이 6개월 정도 지속되면 조기 폐경으로 확진하지만 3개월째 접어드니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불임이 아닌 조기폐경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떤 노력으로도 안 되는, 임신 가능성이 완전 제로라는 뜻이었다.
‘난 겨우 스물아홉 살이라고, 사랑해서 아기를 갖고 태어날 아기에 대한 환상을 가질 평범한 나이일 뿐이라고….’
세라는 낙담했다. 연애, 사랑 그리고 결혼과 같은 달콤한 단어들이 그녀 인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기를 갖고 싶다는 바람은 여전했다. ‘가족은 한 번 생기면 사라지지 않는 내 것이니까.’ 그래도 강호에게 그렇게 말한 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폐경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마음이 조급해졌었다. 제어장치가 고장 난 기계처럼 멈추지 않고 속마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뭐든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강호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던 게 착각이었다.
‘어쩌자고 강호한테….’
“좋은 아침입니다!”
오수아가 버버리 체크 스카프를 휘날리며 자리에 앉았다. 김선형이 오수아 뒤에서 걸어오던 세라에게 주말에 무슨 일 있었냐며 얼굴이 푸석하다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세라는 뜨끔했다. 휴게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향수를 살짝 뿌렸다.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세라가 자리에 앉자 김선형이 세라를 위아래로 장난스레 훑었다.
“화장술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해, 안 그래? 수아 씨?”
김선형이 말했다.
“맞아요. 김 선배가 비비크림 바를 때 보면 정말 맞는 말 같아요.”
오수아가 손거울을 보며 히죽거렸다.
“뭐야, 수아 씨!”
“김선형, 오전까지 매출 현황 확인하는 거 잊지 마.”
세라는 김선형의 농담거리가 이어지기 전에 말을 잘랐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나 문자가 온 게 있는지 확인했다. 아침마다 날아 오는 ‘오늘의 날씨’ 정보 기사 외에는 없었다. 강호의 SNS로 들어가 혹시 올라온 사진이나 스토리가 있는지 살폈다. 홍천 은행나무 숲에서 찍은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퇴근길에 세라는 환하게 불 켜진 병원 앞에서 멈춰 섰다. 평소에는 불이 꺼져 있을 시간이었다. 망설이다가 정 박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는 아직 병원이라며 괜찮으니 들르라고 했다. 텅 빈 병원 로비는 조용하고 차가웠다. 어항에서 산소 공급 중인 물방울 소리만 간혹 들렸다.
정 박사가 알려 준 대로 불이 켜진 1층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접고 세라를 반갑게 맞았다. 책들을 한쪽으로 밀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다른 증상 있어요?”
“얼마 전 부인과에서 진료받았어요. 호르몬 수치가 증가했대요. 조기 폐경이 올 수 있다고 해요.”
“흠, 그것도 하나의 증상이긴 한데.”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폐경 전에 아기를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금 생리는 어때요?”
“3개월째 없어요.”
“이런,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건 담당의와 확인해 봐야겠지만, 임신이 가능하더라도 신중해야 해요.”
“왜요?”
“남들 다 해서 쉬워 보이지만 출산이라는 게 그렇지 않아요. 출혈도 심하고 더군다나 노화 증상이 나타나면 아기를 낳고 돌보는 일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까요.”
세라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나라에 난치질환 환자가 얼마나 될 거 같아요? 그게 아마 80만 명 정도 된다지요. 이건 내가 위로하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수치로 나와 있는 거예요. 혼자라는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요? 무엇보다 본인 건강만 생각해요. 당장 어떻게 되는 거 아니니까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고.”
정 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 한 가지 여쭤봐도 돼요?”
세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보세요.”
“그럼 전에 맡았다던 환자분은 어떻게 되셨어요?”
“흠…. 한 20년 됐으니까.”
정 박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머릿속으로 뭔가를 계산했다.
“45세 되던 해가 마지막이었지. 그렇다고 세라 씨가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때는 연명하는 방법을 몰랐으니까. 지금은 합병증을 잘 치료하면 오래 살 수 있어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선생님 처음 봤을 때 반신반의 했어요. 직접 진료하신 환자가 있다고 하시니 제 맘을 잘 아실 거 같아서요. 늦은 시간에 실례했어요.”
“그 환자 말이에요. 사실….”
정박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천장을 쳐다봤다.
“내 누이였거든. 오라비가 의산데 해줄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다 지난 일이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되는군.”
정 박사는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말투에는 회한이 묻어났다. 세라는 정 박사의 가족사를 들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 정 박사라면 자신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중요한 건 세라 씨 의지예요. 명심해요.”
정 박사가 사무실 불을 끄고 세라와 함께 나왔다. 조용한 복도에 세라의 구두굽 소리가 울렸다. 정 박사는 멈칫하더니 다시 사무실로 가서 쇼핑백 하나를 들고 나왔다.
“높은 구두 신으면 관절에 무리가 가요. 골다공증 수치도 낮던데 운동화나 낮은 신발을 신도록 해요.”
정 박사는 쇼핑백을 세라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마침 병원 복도를 순찰하던 경비가 정 박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세라는 쇼핑백을 안고 정 박사의 뒤를 따라 걸었다. 병원 입구에서 정 박사는 말없이 미소를 짓다가 세라에게 손을 흔들며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선생님….”
세라는 멀어지는 정 박사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