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종(36·KIA)은 지난 17일 광주 삼성전에서 4.2이닝 만에 강판됐다. 9-5로 앞서던 5회초 2사 1·2루에서 정재훈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왔고 양현종은 교체됐다. 교체하러 올라올 때의 그 표정을 보고 ‘설마’ 했는데 “여기까지 하자”는 정재훈 코치의 말에 양현종은 자존심이 확 무너져내렸다.
4점이나 앞서고 있는데 승리투수 요건에 아웃카운트 1개를 남겨둔 채로 선발 투수를 교체하는 것은, 특히나 팀의 에이스라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양현종도 에이스로 올라선 이후로는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마운드 위기의 KIA는 이제 두 외국인 투수와 양현종이 선발 등판한 경기는 무조건 잡겠다는 전략으로 경기한다. 이날 양현종 조기 교체는 이범호 감독이 승리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마운드에서 내려와 더그아웃에서 무표정하게 땀을 닦는 양현종 뒤로 이범호 감독이 다가가 끌어안으며 달래주는 모습이 방송 중계에 포착되면서 리그에서는 또 많은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양현종은 “씩씩대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흥분한 상태였던 게 맞다”고 고백했다.
18일 광주 삼성전에 앞서 기자와 만난 양현종은 “반성했다. 어제 일을 통해 많이 배웠다. 선발 등판을 400경기나 했는데 이런 경기를 해보고, 37살인데도 새로 배울 게 이렇게 있다”고 말했다.
양현종은 17일 삼성전에서 4.2이닝 7피안타 3볼넷 4탈삼진 5실점으로 물러났다. 올시즌 첫 조기강판이자 ‘에이스’ 명함에 어울리지 않는 교체 장면이라 많은 화제가 됐다. 팀 승리를 위한 결정이었다는 이범호 감독의 교체 사유는 합당하지만, 반대로 투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양현종의 심리적 충격이 컸던 이유는 ‘하필 그 타석’이었기 때문이다.
양현종은 “어릴 때 빼고는, 선발하면서 그런 상황에 내려온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승리투수 요건에 대한 아쉬움은 당연히 마음 속에 있었지만, 전 타석에서 안타를 내준 그 타자 타석에서, 그것도 좌타자인데 교체된다는 게 굉장히 자존심 상했다. 나를 못 믿으시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그게 두 배로 충격이 됐던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고 말했다.
양현종은 9-3으로 앞서던 5회초 4번 강민호에게 적시타를 맞아 2점째를 더 주고 5번 이성규를 볼넷으로 내보낸 뒤 교체됐다. 6번 김영웅 타석이었다. 김영웅은 2회 첫 타석에서는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KIA가 3-0으로 앞서던 4회 2사 1·2루 두번째 타석에서는 우익선상에 2루타를 쳐 2타점을 올렸다. 그 다음 세번째 타석 앞에서 위기를 맞자 KIA는 양현종을 교체한 것이다.
이범호 감독은 18일 “이전에 삼성전을 치르면서 김영웅, 김헌곤한테 큰 것을 맞으면서 승부를 넘겨줬던 기억이 여러번 있다. 어제 경기 전 승부처에서 그 타자들 타석이 오면 결정을 해야겠구나 생각했는데 하필 양현종의 볼넷 다음 타석이 김영웅이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어제는 그냥 경기만 생각하고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베테랑 투수 입장에서는 ‘이 상황에 나를 못 믿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한 상황이기도 하다.
양현종은 늘 등판을 마치고도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끝까지 함께 지켜본다. 그러나 이날은 마운드를 내려온 뒤 얼굴이 벌개진 채로 곧장 웨이트장으로 향했다. 경기 시작하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양현종은 “이 기분을 선수들한테 보이면 너무 민폐일 것 같아서 혼자 생각하려고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TV로 야구를 봤다. 솔직히 화가 났고 처음엔 감독님이 미웠다. 그런데 계속 생각해보니까, 지금 팀이 이기고 있는데 내가 뭐 하는 거지, 난 베테랑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팀 승리가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하면서 야구해왔는데, 맨날 후배들한테 팀 승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내 입으로 말해놓고 지금 뭐하는 짓인가, 후배들이 뭐라 하겠나 갑자기 너무 창피했다”며 “사실 맨처음에는 ‘맞아도 9-7인데’ 생각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하니까 9-2에서 9-7까지 가버리면 우리 경기가 넘어갈 수 있는 건데, 무실점도 아니고 내 손으로 5점이나 줘놓고 지금 뭐라는 거냐, 생각이 들었다. 오늘 경기는 정말 뒤집어지면 안 되겠구나 싶었고, 그래서 7회에 추가점 뽑는 거 보고 ‘와 다행이다’ 생각하고 웨이트장에서 나왔다”고 했다.
한 시간 동안 혼자 생각하다 정신을 차리고, 양현종은 8회 라커룸으로 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9회에는 더그아웃으로 나가 함께 경기를 끝냈다. 그리고 경기 뒤 양현종은 감독실로 향했다. 이범호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양현종은 “감독님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도 계속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 제가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감독님이 또 미안하다 하시고, 나는 또 ‘아니다. 제가 죄송하다’고 하고 서로 그냥 미안하다, 죄송하다만 계속 주고받았다”고 웃었다.
KIA는 앞으로 계속 승부수를 띄울 계획이다. 이길 기회가 왔을 때는 반드시 잡아서 승수를 쌓고 승률을 높이며 1위를 지키는 야구를 해야 한다. 전에 해보지 못했기에 당황했던 17일의 경험을 양현종을 비롯한 선발 투수 누구라도 또 하게 될 수도 있다.
양현종은 “처음 겪은 상황이라 많이 당황했다. 이제는 그런 상황을 내가 또 만들면 안 되겠지만, 혹시 다시 그렇게 되더라도 그때는 팀이 이기는 상황이면 아무 상관 없을 것 같다. 이번처럼 이런 행동은 다시 안 할 것이다. 어제 진짜로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