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이라는 초유의 스코어를 비롯해 온갖 기록이 터져나온 31일 광주 KIA-두산전.
또 하나 이색적인 볼거리가 9회 펼쳐졌다. KIA 외야수 박정우(26)가 마운드 위에 올랐고, 두산 우완 불펜 권휘(24)가 2사 주자 없이 타석에 들어섰다. KIA가 9회 백기를 들며 야수를 등판시켰다. 두산은 앞서 6회에 지명타자 김재환을 좌익수 수비로 돌리면서, 지명타자가 소멸됐다.
앞서 두 타자를 땅볼과 삼진으로 처리하며 야수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제구를 뽐내던 박정우가 오히려 투수를 상대로 공이 흔들렸다. 초구와 2구가 바깥쪽 멀리 빠졌다. 투수나 타자나 사실상 큰 의미가 없는 타석, 두산 벤치에서 그냥 휘두르라는 사인이 나왔다. 배터 박스 가장 바깥쪽이 멀찍이 서있던 권휘가 세 번 연속 방망이를 휘둘러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바로 다음 9회말, KIA의 마지막 공격. 이번에는 각자 제 포지션으로 돌아가 다시 맞대결 했다. 8회에 이어 다시 마운드에 오른 권휘가 박정우를 초구 중견수 뜬공으로 잡아냈다. 결과적으로 서로 1타수 무안타씩을 주고 받은 셈.
투수가 타자로, 타자가 투수로 서로 역할을 바꿔 대결한 건 확인할 수 있는 범위(2001시즌 이후) 안에서 역대 2번째다. 2022년 10월 8일, 롯데 이대호의 은퇴경기가 첫 사례다. 투수로 입단 후 타자 전향한 이대호가 LG전 8회초 마운드 위에 올랐다. 류지현 당시 LG 감독은 투수 고우석을 대타로 세웠다. 결과는 4구째 투수 앞 땅볼. 고우석이 때려낸 타구를 투수 이대호가 재빨리 건져 올려 1루로 던져 아웃시켰다. 이대호의 은퇴 경기를 기념하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였고, 이대호와 고우석이 서로 악수하며 포옹하는 것으로 훈훈하게 마무리가 됐다.
투수와 타자가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연달아 맞대결한 사례도 이날 전까지 2차례가 있었다. 1988년 10회초 OB(현 두산) 윤석환이 삼성 권영호를 삼진으로 잡았다. 10회말에는 권영호가 윤석환을 땅볼로 처리했다. 1998년 10회초 해태(현 KIA) 임창용은 OB 진필중을 삼진으로 잡았고, 10회말에는 진필중이 역시 임창용을 삼진으로 잡았다. 13회초 임창용은 다시 만난 진필중을 뜬공으로 아웃시켰다. 다만 이 경우는 양팀 모두 지명타자가 소멸되면서 투수와 투수가 맞대결한 경우다. 전날 박정우-권휘, 2022년 이대호-고우석과는 경우가 다르다.
경기 후 권휘는 ‘치고 싶은 욕심은 없었느냐’는 말에 “사실 제가 방망이를 못쳐서 투수를 한 거라 그런 욕심은 없었다”고 웃었다. 투 볼 이후 방망이를 휘두른 것에 대해서는 “벤치 사인도 있었고, 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권휘가 타석에서 상대한 KIA 외야수 박정우는 덕수고 2년 선배다. 권휘가 1학년 입학했을 때 박정우가 3학년이었다. 지금도 서로 연락을 자주 주고 받는 끈끈한 관계다.
고교 시절에도 박정우가 그렇게 공을 잘 던졌느냐는 말에 권휘는 “정우 형은 투수보다 중견수로 주로 나와서 공을 많이 던지지는 않았다”면서 “원래 공 던지는데는 타고난 선배”라고 했다. 권휘는 “정우 형은 워낙 좋은 선배였다. 악바리 스타일이라 학교다닐 때부터 많이 보고 배웠다”면서 “이따 한번 연락을 드려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비록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타석에 들어선 것부터 평생 다시 없을 지 모를 귀한 경험이다. 권휘는 “타자의 관점으로 투수를 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야구적으로 많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