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2024 파리 올림픽의 ‘신스틸러’로 떠오른 김예지(32·임실군청)는 지난 2일 25m 권총에서 탈락한 뒤 기자와 만나 한숨을 내쉬었다. 금메달을 자신했던 주 종목 탈락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오해가 점점 늘어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 방점이 찍혔다.
김예지는 “탈락했다고 울지는 않았어요. 실수 하나로 사격 그만둘 것 아니잖아요?”라고 되물은 뒤 “올림픽이 큰 무대이지만, 제 인생의 전부는 아니에요. 이 기회에 몇 가지는 정정했으면 합니다”고 말했다.
작게는 그가 가지고 다니는 소품, 크게는 아이에 대한 오해였다.
어느덧 김예지는 상징하는 물건으로 자리매김한 코끼리 인형부터 꺼냈다. 김예지가 특유의 시크한 사격 자세로 표적지를 겨눌 때 총을 잡지 않는 손에 매달려 화제를 모은 그 물건이다. 세간에선 그의 딸이 선물한 애착 인형으로 잘 알려졌는데, 얼핏 차갑게 보이는 이미지에 온화함을 더하는 요소였다.
■아기가 준 코끼리 인형이라고요? 수건입니다!
김예지는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 모르겠네요. 아기 꺼가 아닙니다”면서 “굳이 해명하자면 인형도 아닙니다. 수건이에요. 제가 총을 자주 쏘다보니 손에 화약이 많이 묻어요. 지도자 선생님이 손을 닦으라고 주신 수건인데, 실제로 총을 쏘고 닦는데 써요. (모양이) 귀엽다보니 오해를 샀나 봐요. 이 수건에 적힌 이름이 딸의 이름이라는 분들도 있는데, 제 이름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예지에게 정말 소중한 인형은 따로 있었다. 그가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낡은 곰 인형이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갈색 곰 인형은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났다. 김예지에게는 멀리 떨어진 아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물건이다.
김예지는 “굳이 미소(김예지의 딸)가 준 인형을 밝힌다면 이 것”이라며 가리킨 뒤 “평소 아기하고 차를 타면 뒷좌석에서 심심하잖아요. 그럴 때 손에 쥐어주면서 같이 인형 놀이를 했어요”라고 말했다.
김예지는 즉석해서 인형놀이를 재현했다. 순간적으로 눈썹이 요동치는 그의 몸짓과 다정한 목소리는 눈앞에 딸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기가 곰 인형에게 말을 걸면 제가 대답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미소가 곰 인형에게 ‘너는 왜 이렇게 귀엽게 생겼니?’라고 물으면 제가 (복화술처럼) ‘난 원래 이렇게 귀엽게 생겼어. 미소 넌 왜 귀엽니?’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죠”라고 추억을 떠올렸다.
■진짜 애착 인형은 낡은 곰 인형
김예지가 인형에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이젠 자주 만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워킹맘’으로 알려진 그는 사실 배우자와 이혼해 홀로서기에 나선 상태다. 소중한 딸도 그가 아닌 전 남편과 같이 살고 있다.
김예지는 ‘미소가 이제 인형 놀이를 졸업했나요?’라고 묻는 기자에게 “아니요. 졸업은 아니에요. 아이가 아빠한테 가면서 ‘엄마 이거 보면서 내 생각하고 있어’라고 주고 간 거죠. 저한테는 정말 소중한 인형입니다. 항상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애착 인형인 거죠”라고 말했다.
김예지는 갑작스러운 인기에 다소 부담을 느낀다는 소회도 털어놨다.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쌓인 메시지는 대회 기간 읽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갯수도 갯수지만 어느 나라 말인지도 알 수 없는 다양한 언어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김예지는 “이제 대회가 끝났으니 조금씩 읽을 생각은 있어요. 그런데 제가 SNS를 잘 안 해서 진짜 저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걸요? 진짜 맞습니다. 굳이 계정을 공개할 생각까지는 없지만요. 제가 허무하게 탈락해 금세 인기가 식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어요”라고 웃었다.
김예지는 SNS와 거리를 두는 편이지만 본의 아니게 이번 대회 SNS 계정을 하나 만들었다. 자신을 유명인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에게 올림픽 관람을 제안하느라 1일 엑스(X·옛 트위터) 계정을 추가했다. 게시물 1개, 인용된 횟수도 단 1개인 새 것 그 자체다.
■국제사격연맹 제안에 머스크를 초청한 김예지 “왔으면 놀랐을 것”
김예지는 “국제사격연맹의 제안이었어요. 머스크 CEO에게 오늘(2일)이나 내일(3일) (제 경기를) 구경하러 오시라고 하는 내용입니다”면서 “만약 오늘 경기에 오셨다면 잘하다가 (0점을 쏘는) 깜짝 실수에 너무 놀라셨을 것 같아요. 솔직히 지금도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탈락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로 방아쇠를 당긴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예지는 이날 급사(7초 후, 3초 내 1발 사격을 반복해 5발 사격)에사 첫 10발은 98점. 실수한 11번째 탄환만 0점이 됐을 뿐 나머지 19발은 187점을 쐈다. 575점(27위)으로 탈락했으니 0점이 아닌 10점을 쐈다면 공동 7위로 결선 진출이었다. 세상을 반하게 만들었던 김예지다운 행동이다.
깜짝 인기에 취했을 것이라 오해받기도 했던 그는 다시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다시 사격에 매진하는 평소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오는 20일 나주에서 열리는 봉황기 전국사격대회에서 어김없이 총을 쥐기로 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하는 이 대회에서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을 향하는 첫 총성을 울릴 전망이다. 김예지는 “전 다시 사격의 길로 갑니다. 많은 분들이 사격을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올림픽에서 지키지 못한 (금메달) 약속은 꼭 4년 뒤 LA에서 지킬게요”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