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에 라켓을 처음 잡은 이후 늘 마음 속에 품어왔던 올림픽의 꿈, 3년 전에는 8강에서 그 꿈을 접고 서럽게 울던 소녀는 숙녀가 되었고, 미래의 기대주를 급속도로 지나 현재의 여왕이 되었다. 낭만의 도시 파리로 향하며 “낭만 있게 끝내겠다”고 했던 셔틀콕의 낭만소녀는 승리가 확정되자 ‘감독님’ 앞으로 가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일어나 상대와 악수한 뒤 관중석을 향해 포효하며 자신의 낭만을 마음껏 즐겼다.
안세영(22)이 파리에서 완벽하게 ‘셔틀콕 여왕’ 대관식을 가졌다. 한국 배드민턴 사상 단 한 개밖에 없던 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따내고 세계 배드민턴 여자 단식계의 지존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안세영은 5일 프랑스 파리 포르트드라샤펠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단식 결승전에서 중국의 허빙자오(27·9위)를 2-0(21-13 21-16)으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파리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 따낸 11번째 금메달은 한국 배드민턴 최초의 여자단식 금메달을 땄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방수현 이후 첫 여자 단식 금메달이자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단식 손승모의 은메달 이후 첫 단식 메달이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용대-이효정의 혼합복식 금메달 이후 한국 배드민턴을 통틀어 첫 올림픽 금메달이다.
안세영은 광주체육중학교 3학년이던 2017년 12월 실업 선수들을 제치고 성인 국가대표팀에 역대 최연소로 선발돼 배드민턴 천재라 불리며 등장했다. 천재라도 ‘아기’였던 안세영은 성인대표팀에서 국제대회를 거듭하며 많은 성장통을 겪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1회전 탈락,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8강 탈락한 뒤 매번 눈물을 쏟았고 그 상대가 중국의 강자 천위페이라는 ‘천적’ 관계에도 갇혀 있었다.
그러나 파리올림픽을 약 2년 앞둔 지난해 초반부터 급속도로 성장해 배드민턴 최고 권위의 메이저대회인 전영오픈을 우승했고 연승 가도를 달리면서 지난해 7월에는 세계랭킹 1위로 올라섰다. 그 뒤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모두 ‘방수현밖에 없었던, 방수현 이후 처음’이었다. 방수현도 갖지 못한 세계개인선수권 금메달까지 따낸 안세영은 한국 배드민턴의 염원이었던 올림픽 금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세계배드민턴 여자단식은 강자들이 즐비하다. 세계 1위 자리를 어린 안세영에게 내주고 최근 빅이벤트에서 물러났던 ‘전 세계 1위’들이 모두 올림픽에서 승부를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 2위 천위페이(26)는 8강에서, 3위 타이쯔잉(30·대만)은 조별 예선에서, 세계 4위 카롤리나 마린(31·스페인)은 준결승에서 각각 물러났고 바로 직전 세계랭킹 1위였던 현재 6위 야마구치 아카네(25·일본)는 안세영이 8강에서 직접 물리쳤다. 세계 톱랭커 중 혼자 살아남은 안세영은 완벽하게 우승, 세계 1위의 위엄을 보여줬다.
결승에서 만난 허빙자오는 세계랭킹 9위로 안세영이 상대전적 8승5패로 앞서 있었지만 지난해 아시아선수권대회 8강에서는 안세영을 2-0으로 꺾었다. 앞서 8강에서 안세영의 ‘숙적’ 천위페이를 탈락시킨 주인공이다.
8강의 야마구치, 4강의 툰중을 상대로는 모두 1게임을 내준 뒤 멀쩡한 체력으로 2·3게임을 따내 역전승 했던 안세영은 결승에서는 1게임부터 몰아붙였다.
움직임이 달랐다. 공격적인 허빙자오에 맞서 공격적으로 경기했다. 초반 뒤지다 역전한 뒤 벌려나간 안세영은 1점 차로 쫓아와도 계속 다시 달아나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체력왕’ 안세영은 긴 랠리를 반복하면서 결국 포인트를 따내 상대를 지치게 만들었다. 20-13 게임포인트에서 결국 허빙자오가 네트를 넘기지 못하며 안세영은 1게임을 가져왔다.
기선을 제압한 안세영은 2게임에서는 압도했다. 중반 11-11로 동점을 허용했지만 다시 16-11까지 달아났고, 20-16 매치포인트에서 허빙자오의 범실로 승리를 끝냈다.
아시안게임, 세계개인선수권대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림픽까지 모두 우승해 자신만의 그랜드슬램을 완성하는 것이 꿈이라 했던 안세영은 만 22세에 그 꿈을 이뤘다. 한국 올림픽 역사와 배드민턴 역사를 완전히 새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