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연예인들이 실제 만나면 세워진 이미지와 달라 놀라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배우 엄태구의 경우는 참으로 극적이었다. 직접 만난 그의 표정, 말투, 몸짓에서는 ‘과연 이 사람이 스크린과 TV 안에서 잔혹한 인물을 연기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물론 코로나19 기간 비대면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빼놓으면 5년 만의 대면 인터뷰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직접 만난 엄태구는 조심스럽게 부끄러움도 많고 배려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서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의 이미지를 자아내는 ‘놀아주는 여자’의 서지환 역할은 어찌 보면 안성맞춤으로 보이기도 한다.
“작품이 끝나고 많은 대본을 받는다는 기사가 나갔는데, 실제로 많이 받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 때문에 힘을 많이 얻은 것은 분명해요.”
그가 연기한 서지환은 ‘놀아주는 여자’ 반전매력의 포인트다. 과거 조직폭력배의 아들로 어둠의 세계에 있었지만 과감하게 조직을 청산하고 이들을 갖고 육가공업체 ‘목마른 사슴들’을 만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키즈 크리에이터 고은하(한선화)에게 푹빠져,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한 남자의 모습을 귀엽게 그려냈다.
“선화씨와는 ‘구해줘 2’에서 함께 했어요. 구면이어서 초반에 어색함이 덜했죠. 사실 선화씨랑은 말을 계속 못 놓다가 ‘구해줘 2’가 끝나갈 즘 말을 놓게 됐는데, 제가 말을 놓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분이라 이번 촬영도 초반 적응이 편했습니다. 그때 캐릭터가 ‘은아’였거든요. 이번에는 ‘은하’고. 비슷한 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조직폭력배의 아들 서지환과 키즈 크리에이터 고은하의 만남. 새삼 안 어울릴 것 같은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 안의 순수함을 발견하고 자각하는 과정을 거쳐 사랑으로 돋아났다. 시청률 측면에서는 큰 성과라 할 수 없지만, 한선화는 ‘물복숭아’라는 별명을 얻으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고, 서지환 역시 ‘로맨틱 코미디가 된다’는 새로운 이미지를 각인했다.
“찍으면서 ‘현타(현실자각 타임)’라고 하죠. 그럴 때가 많았어요. 바람 부는 날에 멋있게 걸어가는 장면은 촬영시작 5개월이 돼도 부끄러웠죠. 어떻게든 진심으로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은하와 있을 때와, 일할 때의 모습이 완전히 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죠. 제 노력보다는 보시는 분들이 어떻게 보시는지가 더 중요했는데, 뒤로 가면서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 감사했습니다.”
‘잉투기’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을 연출한 엄태화 감독의 동생인 엄태구는 건국대 영화학과에 진학하며 연기를 처음 접했다. 2007년 영화 ‘기담’으로 데뷔한 후, 2016년 ‘밀정’의 하시모토 역으로 얼굴을 알렸다. 이후 ‘택시 운전사’의 군인, ‘낙원의 밤’ 박태구, 드라마로는 ‘구해줘 2’ 김민철과 ‘홈타운’ 조경호 등으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누가 봐도 내성적이었던 그의 성격은 좀처럼 배우라는 직업과 자신을 붙여놓지 못했다. 연기는 혼자서 연구하고 헤쳐가는 작업이라 치더라도, 현장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과정이 마음처럼 수월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때 ‘연기가 적성이 아닌가’ 번민했던 밤도 있었다.
“연기가 잘 안 된다는 느낌도 있고, 촬영현장에서 친해지는 모습이 쉽지 않았어요. 달라져 볼까 싶다가도 이후가 더 어색해지는 경험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 일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저를 챙겨주시는 선배님들이 많았어요. 그분들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밀정’을 큰 전환점으로 꼽았다. 김지운 감독과 선배 송강호는 엄태구가 스스로 연기하는 방식이 틀린 게 아니었다는 확신을 준 은인들이었다. ‘구해줘 2’ 천호진, ‘안시성’ 조인성, ‘낙원의 밤’ 차승원 등도 그런 은인이었다.
“아직 손윗사람들에게는 존대하는 게 더욱 편하고, 멜로 연기도 아직 어색해서 이번에도 감독님께 ‘선화씨 눈을 더 쳐다봐줬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듣기도 했어요. 저 스스로는 100%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앞으로 더욱 많은 작품을 하면서 좋은 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쉴 때는 집에만 있고, 힐링이 필요하면 본가에 가서 강아지와 산책하는 게 취미의 전부인 그는 조심스럽게 ‘멜로 배우’의 꿈을 꾸고 있다. 비로소 어떤 장르를 하고 싶냐는 질문에 “정통멜로를 하고 싶어요”하면서 배시시하게 웃는다. 마치 거친 돌덩어리만 있을 것 같은 산에 조그맣게 피어난 들꽃처럼, 그의 미소는 반전의 매력이 있기에 더욱 가치 있다.
“이번 작품을 끝내고 ‘유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했어요. 팬들 때문이었죠. 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소속사와 이야기해서 팬분들께 감사할 방법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직업’으로서의 연기는 어려워요.(웃음) 하지만 응원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