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떨군 황선우와 안세영의 폭탄선언
매우 큰 기대를 안고 파리에 간 한국 수영의 출발은 좋았다. 김우민이 자유형 400m 예선에서 조 7위로 떨어질 뻔하다 결선에서 역영을 펼쳐 동메달을 땄다. 박태환 이후 12년 만에 첫 메달을 따내 순항을 예고했지만 황선우는 반대였다. 주종목 200m 예선에서 전체 4위로 좋은 성적을 내놓고 저녁에 열린 준결승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8명이 결승에 나가는데 0.04초 차로 9위를 한 황선우 스스로도 당황했다. 결승은 당연한 줄 알았던 200m 충격을 황선우는 벗어나지 못한듯 100m에서는 전체 16위로 준결승에 턱걸이 했고, 당일 열린 단체전을 위해 결승을 포기했으나 마지막 주자로 나선 계영 800m에서도 부진해 6위에 머물렀다. 모두에게 충격을 안긴 결과에 가장 당황한 이는 황선우였다.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 고개를 떨군 선수를 마주하고 질문해야 하는 것은 괴롭고, 돌발상황은 당황스럽다.
5일 배드민턴 여자단식 결승전은 이번 대회 내내 한국 기자단이 기다려온 절정의 순간이었다. 안세영은 대회 내내 세계랭킹 1위의 위엄을 보여주며 취재진도 반할 만큼 완벽한 경기력으로 승리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의 방수현 이후 28년 만의 단식 금메달을 따낸 경사의 날, 안세영은 시상식을 마친 뒤 메달을 목에 걸고 자랑하며 팔짝팔짝 뛰며 믹스트존에 등장했다. 천진난만한 모습에 취재진도 미소가 번져나갔지만, 약 4분 간 인터뷰의 마지막에 안세영은 “대표팀과 더이상 함께 하기 어렵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숨소리까지 들리는 거리, 안세영의 바로 코앞에서 웃고 있던 기자들 모두 ‘집단멘붕’에 빠졌다. 이후 메달리스트 공식기자회견에서 추가 발언이 나오면서 옆자리에 있던 중국 기자들이 “무릎 부상 때문에 은퇴한다는 거냐”고 물어 “은퇴는 안 한다. 전혀 아니다”고 답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월드스타 김예지의 0점 격발과 탈락
2024 파리 올림픽의 ‘신스틸러’로 불리는 김예지(32·임실군청)는 금메달리스트 못지 않은 큰 인기를 누렸다. 몸을 한 쪽으로 기운 채 표적지를 맞히는 시크한 사격 자세와 신들린 총 솜씨가 맞물린 덕인데, 올림픽이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사실을 몸소 입증해 화제성을 높였다.
김예지가 지난 2일 25m 권총 본선에서 일으킨 ‘0점 사건’은 온세상을 놀래켰다. 25m 권총은 그가 지난 5월 아제르바이잔 바쿠 월드컵에서 세계 신기록(42점)과 함께 우승해 이름을 알린 주 종목이다. 김예지는 호흡을 고르며 방아쇠를 당기는 완사를 무난히 넘겼지만, 3초 안에 쏴야하는 급사에서 11발째 사격이 0점 처리가 됐다. 금메달을 장담했던 김예지가 결선조차 오르지 못하고 탈락한 순간이었다.
파리에서 300㎞ 가까이 떨어진 샤토루까지 달려갔던 기자도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믹스트존에서 큰 충격을 받은 선수를 위로하느라 바쁜 사이 한국어로 질문을 대신 부탁하는 외신의 요구까지 빗발쳤다. 김예지가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빅 이벤트가 됐다”라는 농담과 함께 눈물 대신 미소를 지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스마일 점퍼’ 우상혁의 눈물
파리 올림픽 육상 경기가 열린 ‘스타드 드 프랑스’는 8만명 이상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높이뛰기 우상혁(28·용인시청)은 11일 이 거대한 스타디움에서 한국 육상 첫 트랙·필드 종목 메달에 도전했다. 예선에서 가벼운 몸 상태를 보여줬기에 결선에서도 메달권에서 경쟁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2m27까지 무난하게 돌파한 우상혁은 2m31, 1차 시기에 바를 떨어트렸다.
2m31은 우상혁의 개인 최고 기록(2m36)뿐 아니라, 올해 최고 기록(2m33)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두 번째 점프에서도 넘지 못했다. 중계 화면 밖 우상혁은 매우 초조해보였다. 트랙을 걷고 또 걷는 동안 연신 얼굴을 두들겼다. 수 만 명 관중 속에 우상혁은 왠지 외로워보였다. 3차 시기, 그런 우상혁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두 손이 모였다. 세 번째 도전도 실패, 우상혁의 파리 올림픽이 너무 일찍 끝났다.
‘스마일 점퍼’다운 미소를 기대한 이날, 우상혁은 눈물을 쏟아냈다.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보단 김도균 용인시청 감독(국가대표 코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는 “저는 그냥 경기를 뛰기만 하면 되는데 감독님은 여러 가지 상황을 다 지켜봐야 해서 더 힘드셨을 것”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공동취재구역을 빠져나갈 때쯤엔 미소를 되찾았다. “다시 기대할 수 있는 모습 보여드리겠다.” 두 번째 올림픽을 마친 우상혁의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