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경기자의 체중에 따라 매겨진 등급을 체급이라고 한다. 공정성 확보를 위해 비슷한 체중의 선수들을 묶는다. 그런데 씨름에서는 여자부와 남자부 체급의 이름이 다르다. 여성은 체중·숙련도와 관계없이 ‘꽃 이름’으로 불린다.
씨름은 2017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세계적인 스포츠가 됐다. 그러나 씨름의 체급명에는 구시대적 성별 고정관념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민속씨름리그에서 남자부 체급은 소백급(72kg 이하)-태백급(80kg 이하)-금강급(90kg 이하)-한라급(105kg 이하)-백두급(140kg 이하) 순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에서 이름을 따왔다.
민속씨름 여자부의 체급은 사군자(매·난·국·죽)를 비롯한 꽃 이름을 사용한다. 매화급(60kg 이하)-난초급(65kg 이하)-국화급(70kg 이하)-대나무급(75kg 이하)-무궁화급(80kg 이하)으로 나뉜다. 과거 사군자와 상관없는 장미급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민속씨름 남자부 체급명은 프로씨름대회가 출범하기 직전인 1983년 공모 사업을 통해 정해졌다. 그러나 여자부 체급명은 씨름협회 내부 협의를 통해 결정됐다고 알려져 있을 뿐 그 유래가 불분명하다. 한국스포츠과학원 김태완 박사는 “여자부 씨름 체급은 공모 사업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씨름협회 내에서 자체 위원회를 통해 결정한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남자부 체급인 산 이름은 높이가 확실하게 있어서 체급의 이미지가 그려지는데 여자부의 꽃 이름은 체급을 표현하기에는 약하다”라며 “차라리 강 이름으로 바꿔서 크기를 표현하는 게 좋겠다는 보고서를 문화체육관광부에 제출했었다”라고 말했다. 대한씨름협회 관계자는 “씨름의 국제화를 위해서는 체급명을 킬로그램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지금은 전통 체급명이 국민에게 익숙하므로 체급명을 바꾸는 건 협회의 과제 중의 하나다”라고 설명했다.
체급 규정이 없는 동호인 테니스에서는 여자부의 부서를 꽃 이름으로 나눈다. 순수 여성 동호인은 개나리부, 일정 승급 요건을 갖춘 베테랑 여성 동호인은 국화부로 규정된다. 남자부 부서가 챌린저부, 마스터즈부, 지도자부, 오픈부 등 나이와 전문성을 기준으로 세분된 것과 비교된다.
한국동호인테니스협회 관계자는 “동호인테니스협회가 생기기 전에 어머니협의회에서 여자 테니스 동호인 시합을 주관했는데 그곳에서 사용하던 개나리부, 국화부 명칭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남자부는 나이가 들면 파워와 스피드가 떨어지기 때문에 나이별로 부서를 구분해야 하지만 여자부 테니스는 파워와 스피드의 비중이 작기에 나이 구분 없이 실력으로 구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지난 5월 발표한 ‘스포츠에서의 성평등하고 공정하며 포용적인 표현을 위한 가이드라인’에서 “성별 고정관념은 스포츠에서의 성차별적 대우를 초래한다”라며 “성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한쪽 성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단어 사용을 피하고 성 중립적인 표현을 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함은주 스포츠인권연구소 사무총장은 “스포츠에서 주도권을 가진 남성들의 상상력이 여성을 꽃으로 비유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스포츠에서의 성차별적 용어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다 보면 그에 무의식적으로 순응하게 되기 때문에 성평등 인식 개선에 악영향을 끼친다”라고 말했다. 함 사무총장은 “남자와 여자의 체급명이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라며 “남성 스포츠를 기본값으로 하고 여성 스포츠를 그 하위로 보는 인식이 체급명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라고 체급명 변경 필요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