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에 ‘손현주 짤방(짤림방지)’를 검색하면 초췌한 모습의 손현주 연기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이 이미지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너희 공부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던가, 주식 관련 큰 손실을 본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라고 여기며 즐겨 쓰기 시작한 대표적인 밈(Meme)이 됐다.
이 사진은 2004년 방송된 MBC 베스트극장 ‘형님이 돌아왔다’의 한 장면이다. 손현주는 이 작품에서 흔히 알려진 ‘거지’가 아니라 운명철학자인 ‘예언자’ 역을 연기했다. 그 초라한 행색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짜 거지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다.
희화화된 이야기긴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손현주가 그만큼 배역에 몰입하는 강도가 높음을 보여준다. 그가 1991년 데뷔 이후 자평하는 ‘잘 생기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오래 대중의 마음을 붙잡는 이유는 그의 ‘진짜’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딜레마에 빠진 판사로 돌아왔다.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유어 아너’의 송판호 역할이다.
“물론 김명민씨의 출연이 좋았어요. 언젠가는 한번 해보고 싶은 친구이자 동생이었거든요. 표민수 감독, 유종선 감독의 존재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랑 같이 오래 일을 한 장민균 실장이라고 있어요. 10년 이상 함께 했는데,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선배는 좀 고생하는 역할을 하셔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선배의 모습을 따를 거다’라고요.”
송판호 역은 몸 고생, 마음고생의 표상과도 같다. 정직하고 따뜻한 판사였던 송판호는 어느 날 천식증상이 있던 아들 송호영(김도훈)이 교통사고를 내고 권력자의 아들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안다. 아내 역시 세상을 떠난 터라 우원그룹의 보스 김강헌(김명민)의 복수가 두려웠던 그는, 결국 자신의 직업적 신념을 버리고 진실을 은폐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힘들면, 당연히 몸도 힘듭니다. 보통 경기도 연천의 세트에서 촬영했는데, 집이 멀진 않았지만 잘 가지 않았어요. 매니저와 하루 촬영을 정리하고 어떻게 표현할지 연구했죠. 김강헌이 저를 협박하면 정말 무서웠고, 어디에 끌려간다고 하면 정말 가기 싫었어요. 늘 연기를 하면 무서우면 무서워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실제로 느꼈습니다.”
여기에 촬영이 한창이던 지난 6월 유명을 달리한 형의 존재는 그의 마음속에 더욱 큰 돌덩어리를 얹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따로 설정하지 않아도 번뇌하는 장면에서 그의 눈동자는 실핏줄이 터져 충혈돼 있다. 고난과 고통이 따르는 역할에 시청자나 관객은 반응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그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맡았던 직업군이 다양했어요. 주로 초반에는 소시민적인 역할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추적자’부터 장르극으로 집중됐던 것 같아요. ‘쓰리데이즈’에서도 대통령이었지만 도망 다녔고, ‘트레이스’에서는 국세청장이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 방송된 tvN ‘세작, 매혹된 자들’에서는 극 초반 유배를 떠난 후 생사가 불명했었죠.”
물론 그 역시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출연해보고 싶고, 소싯적(?) 해보기도 했던 코믹 연기에 대한 욕심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배우는 쓰이는 직업이다. 연출자나 작가가 그를 원하는 손길을, 그는 외면하지 못했다. 그렇게 30여 년이 넘자 마음은 다 따라놓은 술잔처럼 고요해지고 차분해졌다. ‘연기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김명민 역시도 손현주를 ‘산 같은 형님’으로 칭한다. 어떤 메아리도 되돌리는 넓고 깊은 품처럼, 모든 연기를 받아주기 때문이다.
“예전 선배들도 그러셨지만, 작품에는 ‘스펀지’ 같은 역할이 필요합니다. 선배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설사 준비가 채 안 돼 있다 하더라도 내용은 알고 있으니, 어떤 연기라도 받아줄 수 있어야죠. 사실 제가 연기할 때의 초창기에는 미리 어떤 합을 맞출지 서로 상의했지만, 요즘에는 하지 않는대요. 그래도 후배들이 마음껏 연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를 따라라’하는 시대가 아닌 ‘니가 하는 게 옳다’는 시대이기 때문이죠.”
연기에 있어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성을 쌓고 있지만, 손현주의 아성은 딱딱하지 않다. 그 크기는 마치 산처럼 높고도 깊지만, 가까이 가 만지거나 닿아보면 정말로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유연성과 진실성이 배우 손현주를 지탱하는 두 가지 큰 축이다. 그는 잊지 못할 ‘유어 아너’를 마치고, 이 작품을 궁금해했던 하늘나라의 형님을 찾아뵙고 인사할 생각이다.
“김재환 작가님이 결말을 열어놓고 끝내신다고 하시더라고요. 물론 시즌 2 일정이 쉽지 않지만 맞출 각오가 돼 있습니다. 출연료도 깎을 수 있어요.(웃음) 그런 마음으로 ‘모범형사 2’를 만들기도 했죠. 꼭 잘 논의가 돼서 ‘유어 아너’ 두 번째 시즌이 선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