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호 KIA 감독은 지난 3월 프로야구 개막 미디어데이 행사에 청바지를 입고 등장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토크쇼’를 지향하며 KBO가 각 구단에 유니폼 아닌 자율 복장을 권하자 KIA는 감독과 선수 모두 구단 로고가 박힌 후드 상의에 청바지를 입었다. 대부분 팀이 감독은 정장을 갖춰입은 반면 리그 감독 중 ‘젊음의 상징’이 된 이범호 감독은 청바지를 택했다.
1981년생, 만 43세의 이범호 감독은 리그 최초 1980년대생 감독이다. 리그 역사에 흔치 않았던, 40대 초반의 사령탑 데뷔는 역대 가장 거센 비바람 속에서 이뤄졌다. 시즌 준비를 시작하려던 시점에 불미스러운 일로 감독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타격코치로서 출발했던 스프링캠프 도중에 이범호 감독은 사령탑으로 선임됐고 지휘봉을 잡았다.
KIA는 전년도에 6위였음에도 올해는 우승 후보까지 갈 강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선수단 분위기를 추스르는 동시에 다잡아야 하고 어느 정도는 성적을 내야 하는 시즌임을 이범호 감독은 알고 있었다. 미디어데이에서 ‘3년 안에’ ‘임기 안에’를 외치는 선배 감독들 틈에서 이범호 감독은 “올해 우승하겠다”고 했다.
잃을 게 없었던 초보 감독의 당찬 선언은 현실이 되었다. 이범호 감독은 17일 KIA가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하면서 취임 첫해에 바로 논스톱으로 정규시즌을 거머쥐었다. 사령탑 데뷔 첫해 정규시즌을 우승한 감독은 삼성에서 2005년과 2011년 우승한 선동열, 류중일에 이어 이범호 감독이 세 번째다. 삼성 외의 감독에게서는 처음 나온 기록이다.
42세 9개월 23일에 우승하면서 이범호 감독은 역시 2005년 선동열 감독(42세8개월 12일)에 이어 역대 정규시즌 1위에 오른 최연소 사령탑 2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KIA의 바로 지난 우승이었던 2017년 당시 최고참으로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이범호 감독은 두산 김태형, SSG 김원형 감독에 이어 역대 세번째로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우승을 일군 사령탑으로도 기록됐다.
이범호 감독이 사령탑으로 발표되던 날, 호주 캔버라에서 스프링캠프 중이던 KIA 선수들은 오전 훈련을 마친 뒤 소식을 들었다. 어수선했던 캠프 초반의 며칠, 대하기 어려운 감독님보다는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감독님을 바랐던 선수들은 환호를 했다. 이범호 감독은 고참 선수들이 사석에서는 ‘범호 형’이라고 부르던 형 같은 코치였다. 누가 KIA 감독이 될 것인지가 리그 최대 관심사였고, 이범호 감독이 선임된 뒤에는 최고참 최형우와는 2살 차밖에 나지 않는 젊은 사령탑이 위기의 팀에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에 시선이 집중됐다.
이범호 감독은 초보 같지 않은 준비와 치밀한 선수단 관리, 그리고 열린 마인드로 KIA 선수단을 끌고 가 정규시즌 정상을 지켜냈다. 당장의 성적과 오늘 하루 경기를 풀어가는 데 급급하지 않고 시즌을 길게 보는 넓은 시야로 선수들을 관리했다. 박찬호, 김도영, 정해영, 전상현 같은 어린 선수들에게도 틈나는대로 우스갯소리를 가장한 격려의 말을 던지며 선수들의 ‘멘털’을 관리할 줄 아는 감독의 모습은 독보적이다. 투타 최고참 양현종과 최형우를 중심으로 한 선수들의 희생과 어우러지면서, 핵심 선수들의 줄부상 속에서도 KIA가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1위를 끝까지 지켜낸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타자 이범호는 은퇴할 때까지 무려 17개의 만루홈런을 쳤다. 만루에서 통산 타율 0.335와 함께 리그 역대 최다 만루홈런의 사나이로 기록돼 있다. 찬스에서 가장 강한 심장을 가졌던 이범호는 사령탑이 되어서도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멘털과 소신있는 운영으로 리그 감독 역사 주요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이범호 감독은 이제 또 하나의 KBO리그 사령탑 역사에 도전한다. 한국시리즈까지 우승할 경우, 2005년 선동열, 2011년 류중일, 2015년 두산 김태형 감독이 이어 역대 4번째로 취임 첫해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감독이 된다. 사령탑 데뷔하자마자 첫해 통합우승은 역대 세번째가 된다. 어마어마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