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대표팀 홍명보 감독(55) 선임 논란은 처음에는 절차적 공정성 문제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성 축구인과 개혁을 요구하는 새로운 세대 간 갈등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축구계 안팎에서는 지도자로서 실력보다는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후광으로 자리를 지켜 온 이들이 이제는 물러날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은 옛 영광의 주역들이 오히려 한국 축구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 감독의 대표팀 감독 선임은 밑바닥부터 시작해 지도자 자리에 오르려는 이들에게 좌절감을 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축구 대표팀 감독은 더 이상 공정한 경쟁을 통해 올라가는 자리가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자들만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불합리한 시스템의 결정체처럼 여겨진다. 박문성 해설위원은 최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현안 질의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제가 아는 지도자가 ‘이제는 지도자를 그만둘 생각이다. 이름 없는 지도자는 10년, 15년을 계속 굴러도 프로팀 감독, 코치 한번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누군가는 특혜를 받으며 국가대표 감독을 준다? 나는 지도자 못하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문체부는 지난 2일 중간 감사 결과를 발표하며 홍 감독 선임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고, 한 여론조사에서는 홍명보 감독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는 의견이 70%를 넘겼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부교수는 “홍명보 감독의 선임 절차는 형식상 정당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공정성에 큰 의문을 남겼다. 2002 월드컵 세대가 한국 축구계에서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고 봤다. 또 “이들이 지도자 혹은 행정가로서 충분한 커리어와 역량을 쌓았느냐도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앞서 이임생 전 기술총괄이사는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K리그1 2연패 등 성과를 언급했다. 하지만 이 성과가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일궜던 다비트 바그너,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그컵 준우승 등 성과를 냈던 거스 포옛 등 다른 감독 후보보다 낫다고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이번 논란을 두고 신구 세대 간 기득권 갈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력강화위원으로서 감독 추천 임무에 참여했다가 내부 논의 방식을 비판한 박주호를 비롯해 이영표, 박주호에 대한 대한축구협회의 법적 대응 시사를 비판한 이동국, 조원희 등 후배 세대 축구인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협회 고위층 인사들은 이들의 발언을 두고 ‘어떤 자리를 노리고 목소리를 내는 것 아니냐’며 진정성을 의심하지만 경험과 의견 표출 방식의 차이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대길 본지 해설위원은 “해외에서 활동한 선수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면 그들이 보았던 축구 문화와 시스템의 차이로 인해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며 “이전에는 젊은 선수들이나 지도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유튜브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말했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 주역의 막내 격인 이천수는 앞서 개인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제는 기강을 잡는 방식으로는 대표팀을 이끌 수 없다”면서 “해외에서 경험을 쌓은 선수들은 지도자의 능력과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강으로 선수들을 통제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꼬집기도 했다.
기존 한국 축구계의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대길 위원은 “조광래 감독이 레바논전에서 패배한 직후, 기술위원회가 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감독 해임이 발표됐다”고 떠올렸다. 이어 “당시 나는 기술위원회에 몸담고 있었지만, 감독 해임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은 “축구협회의 중요한 결정들이 소수의 고위 관계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기술위원회와 같은 관련 위원회의 역할은 형식적인 것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의사결정 방식은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협회는 보다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