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박경수(40)는 지난 9월28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KT와 키움의 정규시즌 최종전이 끝난 뒤 후배들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함께 뛰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선수로서 함께 하는 정규시즌의 마지막 경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의 운명이 결정되지 않았던 KT는 그 뒤 5위 결정전까지 치르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준플레이오프까지 치렀다. 후배들이 뛰는 가을야구에 동행하던 박경수에게 무수한 시선이 향했다. 은퇴 전 함께 하는 마지막 가을야구라는 ‘스토리’에 인터뷰 요청도 쏟아졌다.
박경수는 시즌 막바지부터 반복됐던 이런 상황을 꽤 곤란해하고 있었다. 은퇴를 ‘결심’ 한 지는 오래지만, 은퇴를 ‘선언’한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구단은 중대사에 있어 선수가 구단과 먼저 상의해주기를 늘 요구한다. 특히 은퇴는 선수와 구단 공동의 문제다. 은퇴를 앞둔 선수는 구단과 의견을 나눈 뒤 구단을 통해 발표한다. 구단이 예우해줘야 할 선수라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은퇴식 일정 등을 상호 논의한 뒤 이 역시 구단이 대외적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KT 구단은 포스트시즌을 마치고도 사흘이 지난 14일 현재까지도 박경수의 은퇴에 대해 한 번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박경수의 은퇴 결심은 확고하다. 최근에는 은퇴 후 진로에 대해서도 구단과 간단하게나마 의견도 주고받았다. 그러나 시즌이 끝나가도록 구단은 손을 놓고 있는 가운데 여러 인터뷰를 응대해야 했다. 애매한 상황이었는지 지난 모든 인터뷰를 돌아보면 박경수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은퇴한다”는 표현을 하지 못했다. KT가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지난 11일에도 일부 취재진 인터뷰 요청에 곤혹스러워하며 입을 뗐던 것으로 전해진다.
취재진을 비롯해 팬들까지도 박경수가 올시즌 끝으로 은퇴한다 여긴 것은 ‘정황’ 때문이다. 박경수가 몇 년 전부터 마지막을 각오해왔고, 지난 시즌 뒤에는 이강철 KT 감독이 아직은 선수단 리더로서 필요하다 판단해 주장을 맡기며 “1년만 더 함께 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경수는 개막 열흘 만인 4월6일 엔트리에서 제외된 뒤로는 복귀하지 않았다. 경기 전 훈련을 돕고, 더그아웃과 라커룸에서 후배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사이 가교 역할을 해왔다. 시즌 뒤 은퇴한다고 짐작하기에 충분한 정황이지만 구단의 방치 속에 은퇴를 당당하게 ‘공식화’ 하지는 못했다.
올해 은퇴 선수 중 박경수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투수 정우람은 올해 한화에서 플레잉코치로 등록됐다. 계약기간도 끝났고 올해 한 번도 1군에 등록되지 않으면서 은퇴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한화는 9월15일 정우람의 은퇴를 공식 발표했고 9월29일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휘황찬란한 은퇴식으로 제2의 인생을 축복해줬다. 추신수는 올시즌 뒤 은퇴하겠다고 예고했다. SSG 구단은 시즌 전 미리 이를 공식화 했고 막판 순위싸움 때문에 은퇴식은 내년으로 미뤘지만 시즌 중에도 내내 그의 마지막 시즌임을 상기시키고 각종 기념행사를 열었다.
KT도 박경수의 은퇴식은 내년 개막 직후 열기로 최근 정한 상태다. 박경수는 4월부터 엔트리에서 빠져 돌아가지 않으며 시즌 내내 마지막을 준비했고, 구단이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KT 구단이 박경수의 은퇴식을 처음 거론한 것 자체가 9월초. 이미 정규시즌 최종전까지 시구자 등 모든 행사를 채워놓은 시점이라 어쩔 수 없이 내년으로 미뤘다.
박경수는 KT가 꼴찌를 헤매던 시절부터 수 년 동안 주장을 도맡았고 창단후 첫 우승한 2021년의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다. 당시 부상당한 박경수가 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유한준의 부축을 받아 MVP 시상식에 목발을 짚고 올라가는 장면은 야구 팬들의 가슴을 적셨다. KT 구단은 영원히 남기겠다며 당시 그 목발을 박경수로부터 기증받기도 했다. “우리 팀의 상징적인 선수”라고 늘 이야기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마지막 시즌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마쳤다.
타 구단 한 관계자는 “주장도 오래 했고 구단의 첫 우승에 상징적인 선수의 은퇴다. 비즈니스적으로만 봐도 선수와 팬들을 위해 활용할 게 많다. 심지어 선수가 시즌 초반 이후로 뛰질 않았고 은퇴하기로 했다면 최소한 후반기 시작할 때는 논의하고 일정을 정하기 충분한데, 구단 일 처리가 상당히 미숙했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어차피 다들 은퇴한다 생각하니까 공식 발표는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 건지, KT의 가을야구를 보면서 ‘왜 저 구단은 박경수 은퇴를 저런 식으로 처리하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