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정 전 GS칼텍스 감독. 연합뉴스
한국 구기종목 첫 올림픽 메달의 주역, ‘나는 작은 새’ 조혜정 전 GS칼텍스 감독이 별세했다. 향년 71세. 췌장암으로 투병하던 고인은 30일 오전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공수에서 맹활약하며 한국 여자배구를 3위로 이끌었다. 한국 구기 종목이 올림픽에서 따낸 첫 메달이었다. 키는 165㎝로 작았지만 뛰어난 점프력으로 단점을 보완했다. 몬트리올 대회 당시 단신의 그가 상대 장신 블로킹 벽을 헤집으며 코트 곳곳으로 스파이크를 때려 내는 걸 보고 외신은 ‘나는 작은 새(Flying little bird)’라고 별명을 붙였다.
‘명 세터’ 유경화 전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위원(70)은 “언니는 배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였다”고 고인을 이야기했다. 유 전 위원은 고인의 숭의여고 1년 후배다. 실업배구(대농)와 대표팀에서도 함께 활약했다. 몬트리올 대회에서도 유 전 위원이 토스를 올리면 고인이 공격을 했다. 유 전 위원은 “당시엔 올림픽을 앞두고 1년 동안 국내 시합은 참가도 안 하고 선수촌에서 합숙만 했다”며 “눈빛만 봐도 서로를 아는 사이였다”고 말했다.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을 따냈는데도 고인은 선수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유 전 위원은 “언니가 경기 중 다리에 쥐가 났다. 그때만 해도 물리치료사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 아니냐. 언니는 자기가 컨디션이 좀 더 좋았다면 금메달도 딸 수 있었을 텐데 미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언니를 탓하지 않았다”고 했다. 올림픽 이후로도 고인과 유 전 위원은 50년 가까이 끈끈한 인연을 맺었다. 골프 선수로 성장한 고인의 두 딸이 서울에서 훈련할 때는 고인까지 모두 몇 달씩 유 전 위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여자 배구 대표팀. 조혜정 전 감독(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과 유경화 전 KOVO 경기위원(앞줄 왼쪽 첫번째)이 보인다. 스포츠경향 DB
2011t시즌 V리그 여자부 미디어데이 당시 조혜정 GS칼텍스 감독(가운데). 스포츠경향 DB
고인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배구를 시작했다. 숭의여고 3학년인 1970년, 17세로 처음 국가대표에 뽑혔다. 국세청과 대농(미도파) 등 실업팀을 거쳐 1977년 은퇴했다. 현대건설에서 잠시 코치를 지내다 1979년 이탈리아로 가서 2년간 플레잉코치로 활약했다. 은퇴 후 배구 행정가와 지도자로 활동하다 2010년 여자배구 GS칼텍스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첫 여성 감독이었다.
현역 시절 ‘제2의 작은새’라고 불렸던 장윤희 중앙여고 감독(54)은 ‘감독 조혜정’을 기억한다. 장 감독은 고인이 지휘봉을 잡은 GS칼텍스에서 코치로 첫발을 디뎠다. 장 감독은 “선수들에게 엄마 같은 감독님이셨다. 베풀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며 “코치들에겐 좀 더 엄격한 편이었는데, 같은 포지션이었던 저한테는 더 많은 숙제를 주셨다”고 기억했다.
장 감독은 전에 없던 길을 개척한 고인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는 “제가 선수 생활을 할 때만 하더라도 여자가 감독을 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며 “감독님이 여성 최초 지도자가 되면서 후배들도 꿈을 펼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고인은 1981년 프로야구 선수 출신 조창수 전 삼성 감독대행과 결혼했다. 딸 조윤희와 조윤지는 모두 골프 선수로 성장해 KLPGA에서 뛰었다. 고인의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1월1일 오전 6시30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