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가 연습 주행 때 착용한 추모 헬멧.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스켈레톤 국가대표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가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 헬멧’을 착용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출전이 전격 무산됐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 헌장 제50조(경기장 내 정치·종교적 선전 금지) 및 ‘선수 표현의 자유 지침’ 위반을 이유로 대회 참가 자격을 박탈했다.
IOC는 12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헤라스케비치가 경기 중 해당 헬멧을 착용하겠다는 입장을 철회하지 않아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IBSF) 배심의 결정에 따라 출전이 불가하다”고 밝혔다. 결정은 경기 시작 약 45분 전 통보됐으며, 선수의 올림픽 출입증(아크레디테이션)도 회수됐다.
헤라스케비치는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숨진 우크라이나 선수·지도자 20여 명 얼굴을 헬멧에 새겨 훈련 주행에 나섰고, 본 경기에서도 이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IOC는 “메시지의 취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기장(field of play)’에서의 표현이 문제”라며 절충안으로 ▲검은 추모 완장 착용 ▲경기 후 믹스트존에서 헬멧 공개 등을 제시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날 오전 코르티나 슬라이딩센터에서는 IOC 위원장 커스티 코번트리가 직접 현장을 찾아 헤라스케비치와 비공개 면담을 진행했다. 코번트리 위원장은 취재진 앞에서 “그의 메시지는 강력한 ‘기억과 추모’의 표현이며, 누구도 그 취지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경기 현장에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헤라스케비치는 “여러 차례 만남에도 공통분모를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IBSF와 IOC가 내가 규정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며 “다른 선수들의 표현은 허용되면서 우크라이나 선수만 제재받는 것은 차별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경기 후 ‘No war in Ukraine’ 표지를 들었으나, 당시 IOC는 이를 ‘평화 촉구’로 해석해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한 바 있다.
이번 사안과 관련해 헤라스케비치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다만 경기는 이미 진행 중이어서, 판정 결과와 무관하게 이번 대회 출전 기회는 사실상 소멸된 상태다. 그는 지난해 세계선수권 4위에 오르는 등 메달권 후보로 평가받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안드리 시비하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IOC가 금지한 것은 선수가 아니라 IOC 자신의 명예”라며 “미래 세대는 이를 수치의 순간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의 일부 선수와 정치 지도자들도 공개 지지를 표명했다.
반면 IOC는 “선수 공동체와 함께 정립한 원칙에 따른 결정”이라며 “모든 선수가 안전하고 중립적인 환경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IBSF의 이보 페리아니 회장도 “그가 출전하지 않는 것은 규정에 따른 결과”라고 선을 그었다.
스켈레톤 남자 경기는 12일 1·2차, 13일 3·4차 시기로 메달을 가린다. 헤라스케비치는 2018년 평창 12위, 2022년 베이징 18위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