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러시아인이 같은 생각은 아니다”…우크라이나 팀 플래카드 든 러시아 여성의 ‘작은 저항’

입력 : 2026.02.18 08:55 수정 : 2026.02.1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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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기간 중 아르코 델라 파체 인근에 선 아나스타시아 쿠체로바. AP

17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기간 중 아르코 델라 파체 인근에 선 아나스타시아 쿠체로바. AP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우크라이나 선수단 플래카드를 들고 입장한 자원봉사자가 러시아 국적 여성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전쟁 4년 차에 접어든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의 그늘 속에서, 그의 선택은 ‘작지만 상징적인 저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8일 영국 가디언과 AP통신 등에 따르면, 이 여성은 러시아 출신 건축가 아나스타시아 쿠체로바로, 14년째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 중이다. 그는 개회식에서 후드가 달린 은색 롱 패딩과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92개 참가국 가운데 우크라이나 선수단을 이끌고 밀라노 산시로 스타디움에 입장했다. 당시에는 다른 플래카드 요원들과 마찬가지로 신원이 공개되지 않았다.

당초 자원봉사자들의 국가 배정은 무작위로 이뤄질 예정이었으나, 안무가가 선호 국가를 묻자 쿠체로바는 주저 없이 우크라이나를 선택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인스타그램(팔로워 879명)을 통해 이 사실을 처음 공개했고, 이어 AP와의 인터뷰에서 배경을 설명했다. 쿠체로바는 “이 사람들 곁을 걸으면, 그들이 어떤 러시아인에게라도 분노를 느낄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서도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비록 작은 행동일지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선수단은 개회식 당시 단 5명으로 구성됐다. 기수는 쇼트트랙 선수 옐리자베타 시도르코였고, 피겨스케이팅의 키릴로 마르사크도 포함됐다. 두 선수 모두 아버지가 전선에서 참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전쟁이 개인의 삶 깊숙이 파고든 현실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쿠체로바는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을 별도로 밝히지 않았음에도,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곧바로 그의 출신을 알아보고 러시아어로 말을 건넸다고 전했다. 그는 이를 두 나라 국민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깊은 연결성”의 징표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번 행동이 러시아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의 옥중 사망 2주기를 맞아,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환기하기 위한 의미도 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전쟁을 잊거나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스포츠를 하고, 올림픽에 참가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참혹한 배경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입장 직전, 쿠체로바는 우크라이나 선수들에게 “경기장이 기립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속삭였다. 선수들은 반신반의했지만, 실제로 장내에 울려 퍼진 환호는 예상보다 컸다. 그는 “그 함성은 그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의지, 올림픽 무대까지 온 용기를 인정하는 소리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는 선글라스 뒤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털어놨다.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우크라이나 선수단을 이끌며 플래카드를 들고 입장하는 아나스타시아 쿠체로바. AP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우크라이나 선수단을 이끌며 플래카드를 들고 입장하는 아나스타시아 쿠체로바. AP

쿠체로바는 2018년 이후 러시아를 방문하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반전 메시지를 드러낸 이번 행동이 자신과 주변인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 그는 “걱정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다. 내가 목소리를 낸 것이 아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며 모든 자유를 누리는 내가 두려움에 침묵한다면, 그것은 정권이 이미 이긴 것과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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