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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졸당 ‘길사’가 만든 질서…삶과 죽음의 길, 예 있음이오”

입력 : 2026.05.07 01:14 수정 : 2026.05.07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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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종택 길사, 30년만에 찾아온 중대사

불천위 길사, 조상과 종손을 가르는 질서…빗속에도 흔들림 없어

종손 교대식 속 아련한 종부 교대의 아스라함

[투어테인먼트] “수졸당 ‘길사’가 만든 질서…삶과 죽음의 길, 예 있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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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종택,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방계로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내는 명문가다. 흔히 수졸당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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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제사는 대개 4대 봉사(부·조부·증조부·고조부), 즉 윗대 4대까지만 지내는 것이 상례다. 불천위란 그의 공덕이 타의 모범으로 칭송받을 집안에 내려지는 명예다. 4대가 아니라, 시조로부터 출발하니 그 직계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마디로 자타공인 뼈대 있는 집안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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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 이영도는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퇴계의 손자다. 수졸당은 이영도의 아들 이기의 호 ‘수졸’에서 따왔다. 수졸은 ‘항상 겸손하고, 고개를 숙여라, 나서지 말라’는 의미다. 택호 동암종택과 자호에서 따온 수졸당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졸당이란 이름이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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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안에 길사가 열렸다. 집안 종손이 돌아가셔서 그 제주가 바뀜을 알리는 행사다. 고인의 아들이 종손이 되어 불천위라는 위엄 넘치는 제사를 이어받는다. 그 제사의 무게는 종부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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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사는 질서다. 상례의 끝을 이름이다. 장례 후 소상·대상, 탈상 이후 상주는 상중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새질서다. 상주는 종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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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종손과 조상을 가른다. 종손은 이승을 다해 조상이 된다. 상주는 선대 종손의 죽음을 통해 종손이 된다. 조상이 된 종손은 신주로 거듭나 사당에 모셔진다. 종손의 바통은 상주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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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사는 돌아가신 이를 제사의 대상인 조상으로 자리매김하는 절차다. 신주가 돼 사당에 모셔지면, 돌아가신 이는 비로소 후손들이 받들어 모시는 조상으로 좌정한다.

그리해 길사는 종손 승계 의식이다. 신주에는 해당 조상이 현 종손에게 몇 대조인지, 조상의 직책과 위상, 그리고 그 조상을 받들 새 종손의 이름과 관계가 적힌다. 이로써 기존 종손은 조상의 위치로 넘어가고, 새 종손이 제사를 이어받는 구조가 확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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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사는 탈상 이후 돌아가신 종손의 신주를 사당에 모셔 조상으로 좌정시키고, 그 조상을 받들 새 종손의 지위를 공식화하는 상례의 마지막이자 종손 승계의 제사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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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 이영도 종택의 새로운 제주와 종부를 고하며 봉행된 이번 길사는 희귀 세레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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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사 당일인 지난 5월 3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수졸당에 굵은 봄비가 내렸다. 궁예처럼 관심범을 가진 이는 아니지만, 길사 후 종부의 의무를 벗을 수졸당 윤은숙 종부는 눈물을 훔쳤다. 봄비가 오버랩된 그 모습에 아스라한 마음이 느껴져 기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빗방울이 고택의 처마를 타고 내린다. 불천위 귀신들이 빗물을 타고 집안 구석을 어루만진다. 오랜만의 고향 나들이가 비로 인해 자연스럽다. 궂은 날씨에도 진성이씨 문중원들은 사당 앞마당을 지킨다. 길사의 살아있는 목격자다. 새 종부는 알록달록 화려한 의상을 입고, 앞으로 30년은 족히 이을 제례를 약속하며 자신의 의례를 묵언으로 추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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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길사의 모든 진행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홀기(笏記) 낭독으로 막을 올렸다. 홀기는 혼례·제례 등 의식의 진행 순서와 절차를 담았다.

이를 낭독하는 제관이 장중한 음률을 섞어 “제집사 예 관세위”와 “관세”를 연이어 창하자, 제사를 돕는 집사들이 마리오네트처럼 맑은 물에 손을 씻으며 의식에 앞서 정결함을 갖추었다. 이어 제물 진설을 명하는 “설 소과 잔 시저”이란 창에 따라 나물과 과일 등이 법도에 맞게 차려졌다. 사당 안 조상의 신주를 밖으로 모셔 내라는 “출주”와 “주인 예 사당”이란 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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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모셔진 신주는 제청의 제상 위에 근엄하게 자리했다. 곱게 닦여 진중한 구릿빛을 드러낸 방짜유기 위로 과일과 고기 등이 놓인다. 제물은 제상 위에 올려져 신위를 호위한다. 생닭과 붉은 생고기 등이 날 것으로 올려진 것이 특이하다. 거대한 생선적과 화려한 떡고임은 수졸당 특유의 풍성한 제례를 도드라지게 한다. 제청에 신주가 안치되자 새로운 제주는 엎드려 첫 잔을 올리는 초헌례를 행했다. 제관의 “축 독축” 지시에 맞춰 축관이 “유 세차 병오 삼월 신유 삭 십칠일 정축”으로 시작하는 축문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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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음력 3월 17일을 기해 새 세대가 가문의 책임을 올곧게 이어받았음을 문중에 고하는 순간이다. 제청에서 헌작이 이어지는 동안, 마당에 비를 피해 천막 아래 도열한 문중원들이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주변의 잡담도 그 조아림 속에 체포돼 고요로 엄숙함을 반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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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원이 큰절을 올리는 마당 한편에는 수십 년간 수졸당의 살림을 책임지며 수많은 제사와 빈객 접대를 도맡아 온 전 종부가 자리했다. 유두차사 때면 대형 홍두깨로 수십, 수백 명의 건진국수를 밀던 그는 길사 후 그 짐을 덜게 되지만 종부의 무거운 짐이 내려질 며느리의 종부 입성이 그리 반길 일만은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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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혼례 예복을 차려입은 새로운 종부가 등장하자, 종부 윤은숙은 곁을 지킨 경국대 전미경 교수에게 조용히 새 종부의 위치를 물었고, 그 시선이 이내 제청 쪽에 꽂혔다. 제청에는 새 종부가 의례를 치르고 있다. 전·신임 종부가 오버랩되는 그 현장이 만감 교차임은 분명하다. 한평생 짊어졌던 무거운 책무를 무사히 인계했다는 안도감과 새 시대를 열어갈 후대에 대한 묵묵한 지지가 미소와 눈물로 급커브를 마다하지 않고 롤러코스터를 탔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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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사의 대미는 종가의 안주인으로 첫인사를 올리는 새 종부의 아헌례다. 붉은 바탕에 금실로 정교하게 수놓은 무늬의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쓴 새 종부는 푸른색과 분홍색 한복을 입은 참사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제청 중앙으로 나아갔다. “행 아헌”이라는 집례의 명에 따라 새 종부는 절을 올리고 두 번째 술잔을 제상에 올렸다. 이 헌작을 통해 동암종택 수졸당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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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비 속에 봉행된 수졸당 길사는 앞선 400년에 이어 어디까지 내달을까. 모두 잊혀진 우리네 의례 속에도 불천위 수졸당의 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땅에 아로새겨졌다. 이들의 정성에 감복한 불천위가 이를 하늘에 데칼코마니로 그려냈을 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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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사는 끝났다. 그리고 시작됐다. “주인 예 사당(主人 詣 祠堂)”이다. ‘주인’은 제사를 주관하는 주상주다. 이번 길사를 통해 수졸당의 제사를 새롭게 책임지게 된 제주다. 제관은 조상의 신주를 직접 모시기 위해 사당으로 경건하게 나아가라고 외친다. 길사는 만사로 이어지겠다. 만사가 끝내 만사성(萬事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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