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현 야구 대표팀 감독이 11일 서울 KBO회관에서 스포츠경향 창간 21주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김정근기자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의 감격도 이제는 다시 가슴 속에 묻었다. 류지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55)의 시계는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는 9월 열리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야구는 대회 5연패에 도전한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지난달 “류 감독을 아시안게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적격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제 대한체육회 승인 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WBC를 준비하는 과정은 류 감독에게 길고 치열한 시간이었다. 그는 대표팀을 꾸리는 동안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고, 체중도 6㎏이나 빠졌다. WBC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편하게 잠들 수 있었고 체중도 다시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지만, 또 다른 큰 무대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다시 시작됐다. 스포츠경향은 창간 21주년을 맞아 지난 11일 류 감독을 만나 WBC 기간 미처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와 아시안게임 구상에 대해 들었다. 류 감독은 이날 귀국 후 세 번째 KBO 전력강화위원회 회의를 마친 뒤 인터뷰에 응했다.
대표팀은 지난 3월 WBC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호주전에서 7-2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8강 진출에 성공했다. 당시 한국은 단순 승리만으로는 부족했다. ‘5점 차 이상 승리, 2실점 이하’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만 했다. 가능한 시나리오는 5-0, 6-1, 7-2 단 세 가지뿐이었다. 대표팀은 그 험난한 경우의 수를 모두 통과한 끝에 가까스로 8강 티켓을 손에 넣었다.
경기 후 류 감독은 참았던 감정을 끝내 쏟아냈다. 더그아웃에서, 감독실에서, 그리고 믹스드존 인터뷰 도중에도 눈물을 흘렸다. 경기 중에도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힘겨웠다고 했다. 지난해 2월 감독 선임 이후 1년 넘게 이어진 준비 과정이 그만큼 절박하고 치열했다는 의미였다.
류 감독은 “단순히 이기기만 해서 되는 경기가 아니었다. 굉장히 어려운 조건들을 동시에 만들어내야 했다”며 “어린 선수들이 그 큰 부담을 이겨내고 제대로 플레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더그아웃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선수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느꼈던 감정은 바깥에서 단순히 ‘이겼다’고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돌아봤다.
8강행이라는 높은 난도의 경우의 수를 뚫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경기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변수까지 발생했다. 호주전 선발로 준비했던 손주영이 경기 도중 어깨 불편함을 호소했고, 결국 1이닝 만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사실 손주영은 원래 대만전 선발 카드였다. 그러나 조별리그 첫날 호주가 대만을 꺾는 이변이 발생하면서 대표팀의 전략도 크게 수정됐다. 류 감독은 “호주가 대만을 이기면서 계획을 바꿨다”며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호주 타선이 좌완 투수에 약했다. 그래서 주영이를 대만전에 쓰지 않고 호주전 선발로 아껴뒀다. 3회 정도만 잘 막아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손주영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내려가면서 대표팀은 순식간에 비상 상황에 놓였다. 그때 팀을 구한 선수가 바로 42세 최고참 노경은이었다. 갑작스럽게 마운드에 오른 그는 2이닝 무실점 호투로 흐름을 완전히 끊어냈다.
류 감독이 WBC 기간 가장 고마웠던 선수로 여러 차례 노경은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다. 노경은은 1월 사이판 캠프 때부터 누구보다 빠르게 몸 상태를 끌어올리며 대표팀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8강 진출 운명이 걸린 마지막 경기에서, 최고참다운 책임감으로 팀을 지켜냈다.
류지현 야구 대표팀 감독이 11일 서울 KBO회관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정근기자
돌이켜볼수록 가혹했던 호주전이었다. 대표팀은 직전 경기였던 대만전에 4-5로 석패하며 8강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 상태였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 역시 류지현 감독이었다. 그는 경기 후 숙소로 돌아간 뒤 2시간 넘게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류 감독은 “씻지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있었다. 패배 결과에서 쉽게 헤어나오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오후 6시 30분쯤이었을까. 아직 대회가 끝난 것도 아닌데 감독이라는 사람이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곧바로 전력분석실로 올라가 호주-일본전을 보면서 마지막 경기 준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호주의 약점은 무엇인지, 우리가 8강에 가기 위해 필요한 ‘7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또 ‘2점’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계속 고민했다”고 돌아봤다.
류 감독은 과거 대표팀 사령탑들의 전형적인 ‘카리스마형 리더십’과는 결이 다른 지도자였다. 특유의 친화력과 소통 방식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한국계 선수 저마이 존스가 연습경기에서 출루 후 도루에 성공했을 때 더그아웃에서 양팔로 머리 위 하트를 만든 장면은 류 감독의 스타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는 국가대표팀 감독에게는 특별한 형태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류 감독은 “지난해 11월 체코·일본과 평가전이 사실상 WBC 준비의 출발점이었다”며 “그때부터 선수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류 감독이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전달하려 했던 가치는 ‘존중’이었다. 그는 선수들을 먼저 믿고 배려하려 했다. 선수들 역시 그런 류 감독을 단순히 편한 감독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류 감독은 “감독 스타일이 부드럽다고 해서 선수들이 자기만 생각하기 시작하면 팀은 오히려 흔들릴 수도 있다”며 “그런데 우리 선수들은 정말 순수하고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줬다. 그런 부분들이 팀을 훨씬 단단하게 만들어줬다”고 돌아봤다.
대회를 앞두고 이어진 부상 악재 속에서도 류 감독은 남아 있는 선수들을 먼저 바라봤다. 대표팀 마운드 핵심 자원으로 기대했던 원태인과 문동주가 최종 엔트리 발표 전후로 부상 이탈했고, 8강전 ‘히든 카드’로 기대했던 한국계 메이저리거 라일리 오브라이언의 합류도 끝내 무산됐다.
류 감독은 “부상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죽을 만큼 힘들었고, 죽을 만큼 아쉬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감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지금 있는 선수들이 최고의 대표팀”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류 감독은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실력은 물론이고 국가대표에 대한 진정성과 책임감을 가진 선수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며 “그래서 ‘역대 최고 대표팀’이라는 표현도 여러 번 했다. 그런 선수들 앞에서 빠진 선수들 자리를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제 시선은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으로 향한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경기력향상위원회는 대표팀 최종 엔트리를 확정해 6월 초 발표할 예정이다.
아시안게임 대표팀 구성은 늘 민감한 문제다. 대회 기간에도 KBO리그가 그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구단별 선수 차출은 곧바로 전력 공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순위 경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류 감독은 “굉장히 많은 고민 속에서 명단을 추리고 있다”며 “아시안게임 엔트리는 무엇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결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KBO리그 구단들이 우려하는 부분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며 “결국 대표팀과 구단이 얼마나 잘 협업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류지현 야구 대표팀 감독이 11일 서울 KBO회관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정근기자
선수 구성과 코칭스태프 인선이 마무리되는 대로 류지현 감독은 다시 바쁜 현장 행보에 나선다. 대만과 일본, 미국을 직접 오가며 금메달 경쟁국들의 전력을 확인할 계획이다. 8월 말 일본에서는 전국사회인야구대회가 열리고, 미국 마이너리그에는 대만 대표팀 핵심 자원들이 뛰고 있다. 9월 아시안게임까지 아직 4개월가량 남아 있지만, 대표팀 준비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상태다.
류 감독은 “WBC를 준비하면서 책임감을 정말 크게 느꼈다”며 “프로야구가 10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는데 대표팀이 WBC에서 부진해 리그 분위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상황만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다행히 8강 진출이라는 1차 목표를 달성했고, 특히 마지막 호주전을 보고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는 팬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그런 부분들이 어우러지면서 올해도 리그가 좋은 흐름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을 앞둔 지금, 류 감독은 또 다른 형태의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 대회를 앞둔 설렘이 있는지 묻자 그는 잠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류 감독은 “WBC는 WBC대로, 아시안게임은 아시안게임대로 대회마다 느끼는 부담과 책임감의 결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대표 감독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도 털어놨다. 류 감독은 “야구계 사람들끼리 ‘유니폼을 입느냐, 안 입느냐는 정말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한다”며 “같은 야구 일을 하더라도 유니폼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다시 유니폼을 입고 싶어 한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만큼 유니폼 앞에 새겨진 팀 이름의 무게는 특별하다. 그리고 그 이름이 ‘KOREA’일 때, 그 책임감과 자부심은 더욱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