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진 최고 권위 김용관 “대상 건축물과 깊은 대화, 절정의 순간을 포착하죠”

입력 : 2026.05.20 15:52 수정 : 2026.06.0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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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진가 김용관씨가 지난 14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안경을 만지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건축사진가 김용관씨가 지난 14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안경을 만지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오퍼레이터가 아니라 크리에이터다.”

국내 건축사진가 중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김용관(57)이 자신을 정의할 때 자주 하는 말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건축사진은 건축가 또는 건축주가 의뢰한 상업사진이지만, 그의 작업은 특별하다. 단순의 기록으로서가 아닌, 예술로서의 사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건축물을 하나의 피사체로 보지 않고 주변의 풍경 안에서 오랫동안 음미하면서 미학적 포인트를 탐색하고 절정의 순간을 포착해낸다. 시간과 날씨, 빛과 각도 등에 따라 달라지는 건축물의 다양한 표정을 찾아내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간다. 그는 이를 “건축사진의 주인공인 건축물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오랜 세월, 그에게 ‘작가주의 건축사진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다. 서울 아모레퍼시픽 본사(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김태수), 울릉도 힐링 스테이 코스모스(김찬중), 제주 수·풍·석 박물관(이타미 준)을 비롯해 국내외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이 그의 사진작업을 거쳐 또 다른 차원의 창조물로 거듭났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다. 업계 최고로 비싼 건축사진을 찍는다. 일찍이 사진 출처 표기와 저작권을 주장해 관철한 이도 그다. 촬영 비용을 댄 건축가나 건축주라도, 계약서 내용에 없는 곳에 그의 사진을 쓰려면 반드시 사전에 허락을 구해야 한다. 1999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건축가협회(AIA)의 건축사진가상을 받은 그는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요청으로 1만여 점의 원판 필름을 기증하기도 했다.

김용관 작가와의 인터뷰는 지난 14일 경향신문사에서 진행됐다.

김용관이 촬영한 울릉도 ‘코스모스 리조트’(설계 김찬중 / 을릉도 / 2017)

김용관이 촬영한 울릉도 ‘코스모스 리조트’(설계 김찬중 / 을릉도 / 2017)

- 많은 사람이 김용관 작가의 사진에는 ‘힘’과 ‘담백함’이 느껴진다고 말해요. 비결이 뭔가요.

“사진을 시작했을 때부터 선배가 한 번 가면 나는 두 번, 세 번 더 간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선배가 힘에 부쳐 안 오르는 곳도 나는 반드시 올라 전체를 조망했죠. 낮에 본 건축물이 동트기 전 새벽이나 한밤중 모습은 어떤지,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은 어떤지 찾아간 적도 숱하게 많아요. 순수 사진가 못지않은 시각과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제 사진의 색감과 결이 남들과 좀 다르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 사진촬영을 할 때마다 오랫동안 건축물을 들여다보며 머릿속으로 수십 장의 밑그림을 그린다죠. 셔터 한 번 누르는 것도 매우 신중하고요.

“사진의 주인공인 건축물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건축가가 어떤 의도로 설계했는지 건축물을 보며 곰곰이 생각해보고 사용자에게는 어떤 느낌인지 제가 직접 체험도 하죠. 건축물과 대화를 많이 나눌수록 섬세한 결과물이 나와요. 셔터를 신중하게 누르는 것은 저의 오래된 습관이에요. 4×5 대형 원판 필름 카메라로 건축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1990년대 초 필름 한 장을 현상하는 원가가 1만2000원이었거든요. 당시 제 월급이 18만 원이었으니, 당연히 함부로 셔터를 누를 수 없었죠(웃음).”

- 얼마 전 사진산문집 <풍경으로의 건축>(마음산책)을 펴냈더군요. 제목에서 보듯, 김 작가의 사진은 건축물을 에워싼 풍경이 중요 구성요소예요.

“어느 풍경에 건축물이 얹히고, 거기서 해당 건축물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표정이 생기는지 넓게 보려고 해요. 역설적으로 원래 주인공은 풍경이고 그 풍경 안에 건축물이 자리 잡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바라보다 보면 때론 건축가도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나와요. 물론 모든 건축물을 그렇게 촬영할 수는 없지만요.”

- 드론도 사용하나요.

“경우에 따라 가끔 활용하는 정도예요. 그때도 드론으로 촬영해 그중 어느 앵글이 결정적 사진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크레인을 불러서 직접 올라가 찍어요.”

- 2019년과 2020년 촬영한 종묘 정전은 어떻게 나온 작품인가요.

“카메라가 크고 무거워서 과거 건축사진가들은 무조건 차를 타고 이동했어요. 하지만 저는 10년 전부터 되도록 걸어요.. 차를 타고 다니면 안 보이던 것이 많이 보이거든요. 그런 과정이 피사체가 될 건축물을 반듯하게도 보지만, 멀리서 보거나 굉장히 가까이 들여다보는 등의 시각적 훈련이 돼요. 건축물은 제자리에 멈춰있는 대신 사진가의 움직임으로 시점이 달라지는 거죠. 종묘 정전도 종로 일대를 걷다가 우연히 세운상가 옥상에 올라가면서 기가 막힌 장면을 보게 돼 촬영하게 된 거예요. 동시대 단일 목조건축물 중 가장 긴 건물인 종묘 정전이 100m의 길고 가느다란 지붕만 드러낸 채 숲속에 박혀 있는 모습이었어요. 저는 그 길이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성능이 매우 뛰어난 망원렌즈를 새로 샀어요. 그러곤 세운상가 옥상에 다시 올라 망원렌즈를 당겨서 촬영했어요.”

김용관이 종로 세운상가 옥상에서 망원렌즈로 촬영한 종묘(서울 / 2019)

김용관이 종로 세운상가 옥상에서 망원렌즈로 촬영한 종묘(서울 / 2019)

김용관 작가는 1869년 1월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금은 고가 아파트가 즐비한 부자 동네가 됐지만, 그가 나고 자란 시기만 해도 아현동은 달동네 판자촌이었다. 동네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이웃들이 줄 서서 공동으로 사용했다.

- 경제적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겠어요.

“우리 가족은 방 한 칸을 세 얻어 살았어요. 제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일곱 식구가 한 방에서 끼어 잤죠.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중고자동차 중개업을 하셨는데, 빚이 많았어요. 어머니가 청소 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죠. 그래도 우리 가족 누구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어요. 형제들 간 우애도 좋았고요. 한 번은 연탄가스로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밤에 요의를 느껴 일어서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그 바람에 식구들이 잠에서 깨면서 살았죠.”

- 어릴 때 꿈은 뭐였습니까.

“야구선수요. 한서초등학교에 다닐 때 축구부였어요. 하지만 야구가 더 좋아 학교를 마치면 동네 형들과 야구 하며 놀았죠. 천안북일고 야구팀의 열렬한 팬이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6개월간 우유 배달과 신문 배달을 해서 모은 돈으로 중고 가죽 야구 글로브와 홍키공(경식공)을 샀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몰라요. 저는 엄마에게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졸랐어요. 하지만 우리 집 형편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어요.”

- 상심이 컸겠군요.

“그랬죠. 저는 수도중학교를 거쳐 선린상고에 입학했어요. 대학은 언감생심이었어요. 공부를 썩 잘했지만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큰형이 제 롤모델이었어요. 큰형의 첫 월급도 아버지의 빚을 갚는 데 고스란히 들어갔어요.”

- 형처럼 학교 졸업 후 바로 취직을 한 건가요.

“아니에요. 고등학교 다닐 때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었어요. 가족을 옥죄는 가난이 진저리치게 싫었어요. 성적이 나쁘고 기술도 없다 보니 학교 졸업 후 2~3년간 취업을 못 했죠. 큰형은 기술이라도 배우라면서 지인을 통해 제 취직자리를 알아봤어요. 스물한 살이던 1990년 월간 <건축과 환경>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어요. 조판작업을 하는 디자인팀에서 주로 인쇄소를 오가는 심부름을 했어요.”

- 그런데 어쩌다 사진을 하게 됐나요.

“저는 출근 이튿날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청소부터 했어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잘 배우고 익혀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어느 날 잡지사 대표가 누가 바닥 청소를 했냐고 물으셨어요. 청소는 이렇게 하는 거라며 저를 크게 칭찬하죠. 그리고는 몇 달 후 제게 사진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지켜봤는데, 제 성격이 차분하고 꼼꼼한 것 같다면서… 대표는 당시 사진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었거든요. ”

- 사진 촬영 경험이 이전에 있었습니까.

“아뇨. 태어나서 카메라를 만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가난 때문인지 어릴 적 사진도 없고요. 대표는 카메라는 기계이기에 배우고 익히면 되는 것이고, 카메라를 잘 다룬다면 앞으로 전문가 소리를 들으면서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 말씀에 사진을 할 용기가 생겼어요.”

- 그날부터 도제식으로 사진을 배운 거군요.

“몇 개월 동안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들고 대표의 보조 역할을 했어요. 그러면서 촬영할 때 대표의 움직임을 어깨너머로 열심히 관찰했죠. 몇 달 후 대표가 저더러 혼자 대전에 가서 김수근 건축가의 유작인 ‘두리예식장’을 촬영해 오라고 하셨어요. 당시는 수동 필름 카레라를 사용하던 시절이고 저는 조작법을 겨우 익힌 상태라 깜짝 놀랐어요. 밤잠을 설쳤죠. 그러곤 새벽 첫 기차를 타고 대전에 가서 건물 앞에 섰어요. 대표가 사진 찍을 때 보였던 동작을 흉내내면서 여러 컷을 찍었어요. 다음날 충무로 현상소에서 찾아온 사진을 대표가 보더니 첫 마디가 ‘넌 천재인가보다’였어요.”

- 엄청난 칭찬이네요.

“격려차 해주신 말씀이겠죠. 그날 대표는 제 사진 중 하나를 가리키며 저녁에 다시 찍어보라고 했어요. 빛을 바꿔보는 거라면서. 그래서 다음날 다시 첫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가서 해 질 무렵까지 기다리다가 건축물을 촬영했어요. 이 사진들이 잡지에 실리면서 건축사진가로 첫발을 내딛게 된 거예요. 이후 대표는 제게 잡지 사진을 전담시켰어요.”

김용관이 촬영한 금강산 아난티(설계 민성진 / 금강산 / 2008)

김용관이 촬영한 금강산 아난티(설계 민성진 / 금강산 / 2008)

그는 민현식, 승효상, 임재용, 김종규 등 국내 대표적 건축가들의 작품을 자신만의 색깔로 촬영해 명성을 쌓아갔다. 그러다가 1994년 1월 독립해 프리랜서로 나섰다. 은행 대출을 받아 1000만 원짜리 카메라 장비 세트를 샀다. 하지만 3개월간은 일이 없어 카메라 렌즈만 닦았다.

“그해에도 건축계 큰 행사인 경향하우징페어가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렸어요. 대형 카메라 장비를 둘러맨 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어느 중년 남성이 저를 막 불러요. 혹시 사진 찍는 분이냐고 묻더니 자기네 전시물을 찍어줄 수 있느냐는 거예요. 행사가 끝나면 철거해야 하니까 전시물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거였어요. 얼마의 돈을 받고 찍었죠. 그랬더니 그는 내일 다시 와줄 수 있냐면서 촬영비가 얼마냐고 물어요. 장당 15만 원을 불렀죠. 10장을 찍어달래요. 당시 일당 150만 원이면 엄청 큰돈이었어요. 다음날 촬영하고 그 결과물을 여의도 본사에 가져다 줬더니, 윗사람이 크게 흡족해했어요. 앞으로 자기네와 일하자고 하더군요.”

- 어떤 회사였는데요.

“건축용 코팅유리 시장 1위인 한국유리공업(현 LX글라스)이에요. 그러니 대치동 포스코센터를 비롯해 그 회사 유리가 들어간 건축물이 서울에 얼마나 많았겠어요(웃음). 그 건축물들의 촬영을 의뢰받았어요.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을 만큼 수입이 좋았어요. 그러다가 <건축과 환경>에서 저와 계약을 맺자고 연락이 왔어요. <건축과 환경>에 입사한 게 제 인생의 첫 번째 기회였다면, 이곳과 다시 프리랜서로서 계약을 맺은 건 두 번째 기회였어요. 이후 3~4년간 건축사진가로서 황금기를 걸었어요.”

- 가장 비싼 건축사진을 찍는 작가라더군요.

“몇몇 사진가들은 원가를 줄이려고 4×5 카메라에 롤필름 홀더를 달아 찍었지만, 저는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원판 필름만 고집했어요. 그러다 보니 원가가 5배나 차이가 났죠. 그러니 최소 3배는 받아야 했어요.”

- 건축 사진들에 대한 출처 표기와 저작권을 주장한 것도 이때부터였나요.

“맞아요. 당시만 해도 건축사진은 관례적으로 돈을 준 의뢰자가 마음대로 사용했어요. 그건 부당한 일이기에 저는 줄기차게 저작권을 주장했어요. 사진값도 비싼데 사진도 맘대로 못 쓰게 한다며 불평하는 건축가들이 적지 않았어요. 법정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분도 계셨죠. 하지만 저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특히 1999년 로댕갤러리 사진으로 미국건축가협회 디자인어워드에서 건축사진가상을 수상한 후 제 결심은 더 확고해졌어요.”

- 국내 사진가로선 최초의 수상이라죠.

“로댕갤러리를 설계한 미국 건축그룹 KPF 의뢰로 촬영한 것인데, 그곳 건축가들이 상패와 함께 ‘당신의 멋진 사진은 우리에게 영광’이라는 취지의 육필 감사편지를 보내왔어요. 저작권을 두고 건축가들과 다툼을 이어가던 와중이어서 문화적 충격이 컸어요. ‘내 이름이 브랜드’라는 생각을 했어요.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김용관만의 건축사진을 찍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 외로웠을 것 같아요.

“임계점에 다다르니 힘들었어요. 2001년 급기야 건축가들 사진은 당분간 찍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2003년까지 2년여간 집에서 박찬호가 뛰는 야구경기를 보면서 딸이랑 온전히 놀았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웃음).”

- 고 김수근 선생이 1966년 창간한 월간 <공간>의 전속작가가 된 건 언제였나요.

“2004년 초 처음 계약해 2011년까지 일했어요. 그때도 저작권을 포함해 저의 몇몇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더라고요. 당시 새로운 대표가 취임하면서 <공간>을 완전히 새로 단장하려던 시기였는데 내부에서 김용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나왔다고 해요. 그곳에서 전속작가로 일하던 때가 제 인생에서 두 번째 황금기였어요. 당대 최고 건축가들의 최고·최신 건축물들을 촬영했으니까요. 섭외도 잡지사가 다 했으니 제가 영업할 필요도 없었고요. 그리고 그 결과물로 인해 자연스럽게 새로운 클라이언트들이 생겨났어요.”

김용관이 촬영한 석 미술관(이타미 준 설계 / 제주 / 2004)

김용관이 촬영한 석 미술관(이타미 준 설계 / 제주 / 2004)

‘바람과 돌, 물과 흙, 그리고 빛’의 건축가로 불리는 고 이타미 준(한국이름 유동룡·1937~2011)과의 인연도 2004년 시작됐다. 이타미 준은 30년 넘게 일본의 무라이 오사무라는 사진작가와 작업해왔다. 이타미 준은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내가 건축가로 성장해서 첫 작업을 완성하면 무조건 무라이 오사무에게 사진을 부탁해야겠다’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타미 준의 첫 작품으로 1971년 만든 ‘어머니의 집’부터 무라이 오사무가 전담해 촬영했다. 김용관의 이타미 준과의 첫 작업은 2004년 <공간>에 실릴 평창동 박대성 화백의 아틀리에와 집, 인사동 학고재 건물이었다. 사진을 본 이타미는 “앞으로 한국에서 내 작업은 김용관이 찍게 해라”고 딸(건축가 유이화)에게 말했다.

- 이타미 준의 제주도 프로젝트(핀크스 포도호텔, 핀크스 콘도, 물·바람·돌을 각각의 테마로 삼은 수·풍·석 미술관, 방주교회) 중 특히 석 미술관을 촬영한 사진을 보고 이타미 준이 눈물을 흘렸다고요.

“<공간> 2006년 1월호 특집으로 이타미 준 선생님의 제주도 미술관이 기획됐어요. 2005년 여름, 일주일 넘게 현장에서 숙식하며 수 미술관, 풍 미설관, 석 미술관 촬영을 마쳤죠. 시간이 지나 그해 겨울 어느 날 아침에 TV를 켜니 제주도 중산간에 눈이 1m 넘게 쌓였고, 비행기도 며칠째 뜨지 못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순간 바로 흰 눈 속에 박힌 붉은색 직사각형의 석 미술관이 연상됐어요. 공항에 전화해보니 3일간 뜨지 않던 비행기가 운항 중이라 해 무작정 갔죠. 하지만 포도호텔부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차가 들어갈 수 없었어요. 장비를 메고 허벅지까지 쌓이는 눈발을 헤치면서 엉금엉금 걸어서 도착했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 2006년 1월호 <공간> 표지에 실린 눈밭의 석 미술관 사진을 받아본 이타미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해요. ‘우리가 뭔가 연결된 것 아니겠냐’는 말씀과 함께요.”

- 그래서 가장 인상적인 작업으로 이타미 준의 제주도 프로젝트를 꼽는 거군요.

“시간이 지나 서울의 어느 행사 자리에 이타미 선생님이 저를 초대하셨어요. 저를 보시자마자 깊게 포옹하시며 ‘고맙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건축가에게 고맙다며 포옹을 받은 건 그때 처음이었어요. 건축사진가에 대한 최고 건축가의 신의, 존중, 동지의식이 강하게 느껴져 뭉클했어요.”

김용관이 촬영한 사우스케이프(조민석 설계 / 남해 / 2013)

김용관이 촬영한 사우스케이프(조민석 설계 / 남해 / 2013)

그는 2009년 출판사 ‘아키라이프’를 설립해 비야르케 잉엘스 그룹(BIG)과 HHF, 3XN 등 외국 유명 건축가들의 공식 사진집을 펴냈다. 이어 2014년 건축잡지 <다큐멘텀>을 창간했다. 여느 건축잡지들이 건축 담론과 비평, 그리고 최신작 건축물 소개가 중심이라면 <다큐멘텀>은 공사 현장까지 포함한 건축의 모든 과정을 사진 다큐멘터리처럼 조명하면서 건축계에 바람을 일으켰다. 사진이 풍성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2018년 발간이 중단됐다.

- 잡지 창간 초기에 꽤 시선을 끌었는데, 왜 5년 만에 발행을 멈췄나요.

“자금난 때문이었어요. 광고 영업을 안 하고 후원도 안 받고 제가 가진 돈만으로 운영을 하다 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어요. 무모했던 거죠. 사무실을 줄이고 자동차를 바꾸고 카메라까지 팔면서 버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빚이 쌓이면서 결국 가진 집도 팔아야 했어요. 이후 월세살이를 하고 있지만 최선을 다한 만큼 후회하지는 않아요.”

-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물로 무엇을 꼽고 싶습니까.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편하게 답해본 적이 없어요. 건축적인 완성도나 아름다움으로 꼽자면 민간 건축이 상당수를 차지하기 때문이에요. 거기서도 최상위로 가면 특정 자본의 프라이빗한 건물들이 대부분이에요. 일반 서민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예를 들면 사우스케이프 같은 골프장의 클럽하우스(건축가 조민석)나 울릉도 코스모스 같은 호텔이 그렇죠. 저는 도서관이나 미술관처럼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공공 건축물들이 미학적으로 더 좋아져야 하고 더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프랑스 문화의 상징인 루브르박물관처럼요.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공공 건축물이야말로 좋은 건축 아닐까요?”

- 요즘 작은 풀꽃처럼 무릎을 꿇어야 보이는 장면에 관심이 있다죠.

“언젠가 울적한 마음을 안고 영주 부석사로 바람을 쐬러 갔는데, 범종루 기둥 밑단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 기둥이 500년 넘도록 여기서 이 큰 구조물을 묵묵히 받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위안도 얻었어요. 그 기둥 밑단이 계속 떠올라 최고 장비를 갖고 다시 찾아가 무릎 꿇고 촬영했어요. 쭈그리고 앉아야 제대로 보이는 작은 풀꽃도 마찬가지예요. 건축사진이란 게 기본적으로 커다란 삼각대를 펴고 그 위에 대형 카메라 올려서 어마어마하게 큰 피사체를 찍는 거잖아요. 그런데 자세를 좀 낮춰서 보면 다른 선들이 나와요. 그만큼 깊이, 집중해서 들여다보는 작가가 되겠다는 의미예요.”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김용관 작가는 오는 29일부터 7월 31일까지 서울 서대문구 연희정음에서 개인전 ‘풍경으로의 건축’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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