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수미. EMK엔터테인먼트 제공
‘여배우에게 출산은 곧 공백기’라는 업계의 편견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2023년 출산 후 불과 한 달 만에 뮤지컬 ‘프리다’로 복귀한 이후 ‘비틀쥬스’, ‘프랑켄슈타인’, ‘그레이트 코멧’에 이어 현재 ‘빌리 엘리어트’의 미세스 윌킨슨 역까지, 굵직한 대극장 메가 히트작을 휩쓸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데뷔 26년 차 뮤지컬 배우 전수미를 만났다.
전수미는 12일 서울 경향신문 본사에서 스포츠경향을 만나 무대 위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비결부터, ‘육각형 배우’로 불리기까지 켜켜이 쌓아온 치열한 노력의 시간을 들려줬다.
■꿈의 무대, 그리고 아이들에게 배운 무대의 무게감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전수미는 탄광촌 소년 빌리의 천재성을 발굴하는 발레 교사 미세스 윌킨슨 역을 맡고 있다. 그에게 이 작품은 단순한 차기작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제 연기 인생을 통틀어 가장 하고 싶었던 작품이었다”면서 “오디션을 보면서 ‘이번에 안돼도 언젠가는 이 작품의 무대에 꼭 서리라’ 다짐했었다”고 회상했다.
막상 작품은 쉽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야하다보니, 다른 작품의 4~5배의 반복 훈련이 필요했다.
배우 전수미가 아역 배우들과 ‘빌리 엘리어트’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역대급으로 힘든 과정이었지만, 오랫동안 동경해 온 꿈의 무대라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무대 위에서 저를 드러내거나 튀고 싶은 욕심이 전혀 없어요. 그저 이 위대한 공동체의 서사 속에서 빌리의 재능을 길러내는 윌킨슨으로 온전히 녹아들고 싶을 뿐입니다.”
어린 아역 배우들과의 호흡은 그에게 매 순간 뭉클한 자극이다.
“솔직히 처음엔 ‘애들이니까’ 하고 은연중에 쉽게 생각했어요. 그런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죠. 극 중 제가 처음 등장해 담배를 피울 때, 불이 붙을 때까지 소리를 지르는 롤을 받은 아이가 있어요. 가끔 소품 라이터가 말을 안 들어서 아이가 숨이 넘어갈 듯 힘들어하기에 ‘힘들면 소리를 조금 끊어서 해라’라고 달랬는데도, 연출에게 받은 역할이라며 끝까지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목이 터져라 제 몫을 해내는 그 아이의 집념을 보면서 오히려 제가 무대의 책임감을 다시 배웠습니다.”
배우 전수미가 ‘빌리 엘리어트’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꿈을 향해 작은 몸을 내던지는 아이들의 모습에 자신의 과거 모습이 겹쳐 연습실이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뭉클함은 비단 배우만의 몫이 아니다. 주옥같은 명대사들은 매회 관객들의 마음속에 각기 다른 파동을 일으킨다.
“한번은 연습 중에 빌리에게 ‘너 할 수 있어. 정말 열심히 했잖아’라고 독려하는 대사를 치는데, 순간 제 과거가 겹쳐 보이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제가 우는 바람에 외국인 연출진까지 다 같이 눈물바다가 됐죠. 저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이 작품을 보며 반드시 와닿는 지점들이 있어요. 사람마다 감동받는 포인트가 다 다르더라고요. ‘예술의 힘으로 이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바꾸는 거야’라는 대사에 꽂히시는 분도 있고, 가벼운 일상 대사 한마디에 위안을 얻고 가시는 분도 있죠.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아서 무대 위에서 단 한순간도, 대사 한마디도 허투루 놓칠 수가 없습니다.”
배우 전수미. EMK엔터테인먼트 제공
■ “다 괜찮다” 초긍정 워킹맘의 에너지와 단단한 뿌리
출산 후 한 달 만의 무대 복귀. 체력적인 한계는 없었을까. 전수미는 자신만의 폭발적인 에너지 원천으로 ‘초긍정 마인드’를 꼽았다.
“‘다 괜찮아, 하면 되지 뭐’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커요. 밤 12시에 퇴근해 다음날 아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새벽에 대본을 본 뒤 아침 7시에 눈을 떠요. 일 때문에 아기한테 소홀하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텐션을 높여서 놀아주죠. 물론 예전 같지 않은 체력을 버티기 위해 아이 등원 후 매일 실내 자전거와 근력 운동을 2시간씩 빡세게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엄마가 된 후, 그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여유를 찾았다고 고백했다.
“예전에는 ‘이다음엔 어떤 작품을 해야지’ 하는 조급함이 컸다면, 아이를 낳고 나서는 내 삶의 영순위가 생기다 보니 오히려 무대 위에서 마음이 비워지고 편안해졌어요. 그 덕분에 연기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2000년 이십대 초반 데뷔 이래 순수 창작극부터 대극장 라이선스까지 계단식 성장을 이뤄낸 전수미. 그를 ‘대체 불가 육각형 배우’로 만든 무기는 다름 아닌 ‘춤’이다.
“저희 때는 춤을 못 추면 오디션에서 노래조차 시키지 않았어요. 발레 턴을 돌기까지, 그리고 탭댄스를 배우며 겪었던 그 고통의 시간들이 무대 위에서 제 몸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죠.”
배우 전수미. EMK엔터테인먼트 제공
신인시절 맨발로 춤을 추다 대못이 박히고도 무대를 마쳤던 전설적인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다. 어린시절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때는 고생이 고생인 줄도 몰랐다”며 웃어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수미야, 애썼다. 그때 뭐든 가리지 않고 다 경험해 봤기에 지금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라며 담담한 위로와 칭찬을 건넸다.
뮤지컬계 최정상의 기량을 뽐내고 있는 그에게, 많은 팬들은 매체(영화, 드라마) 진출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전수미 역시 스크린과 브라운관 진출에 대해 “기회가 주어지면 너무 하고 싶다”며 활짝 열린 가능성을 시사했다.
“연출자가 무언가를 요구했을 때 ‘무조건 해보겠다’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죠. 장르에 상관없이 새로운 얼굴을 보여드리고 싶으니, 언제든 불러주세요.”
20년 넘게 객석을 지켜주는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감사라고 말하는 전수미. 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무대에 들어가는 순간 ‘쑥’ 하고 그 캐릭터로 완전히 바뀌는 순간의 공기와 숨소리가 저는 너무 짜릿하고 좋아요. 어느 작품이든 그냥 그 극 속의 인물 자체로 보이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90살이 되어 할머니 역할을 맡을 때까지 끝까지 무대에 남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