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 못 할 줄 알았다.”

김남길은 상상조차 못 했다. 개봉은 아예 내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민감한 사회 문제를 꼬집는 영화의 운명이었다.

기획하고 촬영할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상상은 4년 후 현실이 됐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경주에서는 지진이 일어나고, 주변 원전은 위태로워졌다. 일본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바로 우리 옆에 다가왔다. 영화 <판도라>를 기획할 시점에서는 스태프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판도라>를 열었다.

김남길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원전 폭발 사고 현장으로 뛰어드는 재혁을 연기했다. 재혁은 할리우드식 영웅은 아니다. 찌질한 동네 형 같은 인물이다. 원전 사고로 아버지와 형을 잃었다. 원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하청업체 노동자로 원전에서 일한다.

“재혁이 할리우드식 영웅이 아니어서 출연했다. 현실적인 인물이다. 의연해지고 싶지만,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현실적이다.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 도망갈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남들이 보면 영웅이겠지만, 재혁은 그렇게 보이기도 되고 싶지도 않았다.”

김남길은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남성적이면서도 코믹한 매력으로 8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무뢰한>에서는 냉철한 형사로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다. <판도라>에서는 전작의 캐릭터와는 다른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왔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늦잠자는 게 취미다. 틈만 나면 원양어선을 타고 마을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예전에 배우는 자신만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가운 이미지가 많았다. <판도라> 재혁 캐릭터를 맡으면서 생각을 바꿨다. 나쁜 남자에서 좋은 남자로 바뀌는 중이다. (웃음) 촬영하면서 일부러 살을 찌웠다. 재혁은 철없는 둘째 아들이다. 너무 마른 몸이면 인물과 괴리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장면은 이틀 안 먹고 찍었다. 안 먹어서 부어 있는 몸이다.(웃음) <해적: 바다로 간 산적> 할 때는 연기를 부여잡고 있었다. 코미디 연기가 생각보다 어렵더라. <무뢰한> 할 때는 연기에 힘 빼고 싶었다. 정서적인 부분을 표현하려니 힘을 빼야 했다. 그래도 멋을 부리는 게 보였다. 재혁은 사투리로 감정 표현하는 게 힘들었다. 박정우 감독한테 서울말로 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철부지 재혁이 사투리로 투덜거리는 게 더 돋보인다는 말에 죽어라고 연습했다. 부산에 놀러 가서 사투리 써봤는데 택시기사가 바로 알아차리더라. 그래서 완벽하게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은 포기했다.”

<판도라>는 현시국과 맞물리는 장면이나 대사는 편집됐다. 원전 사고 이후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축소, 편집했다. 현시국과 맞아떨어지는 대사도 편집했다. 김남길은 편집된 장면과 대사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판도라>는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닌 재난극이다. 박정우 감독이 일부러 편집했다. 촬영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원전사고 영상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참고했다. 폐허가 된 체르노빌은 황폐한 미래도시 같았다. 가상현실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연기했다. 연기하면서도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니까. 그런데 이게 현실이 됐다. 너무 무서웠다. 폭발 사고 이후에는 각혈과 구토 정도로 톤을 낮췄다. 우리는 청와대 장면은 몰랐다. 찍을 때도 만나지 못했다. 재혁이 ‘사고는 지들이 내고 수습은 우리가 하냐’라고 하는 대사가 있다. 이게 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다. 사고 나면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하나에서 출발했다. 현실은 답답하지만, 각자 위치에서 생각할 계기가 됐으면 한다. 시국과는 별개로 작품 그 자체에 주목했으면 좋겠다.”

촬영 현장도 재난 현장과 마찬가지였다. 파편이 날아들고, 먼지 투성이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다. 재난 영화 특성상 엄청난 소음으로 인해 무전기는 필수였다.

“투덜거리는 재혁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 (웃음) 당분간은 재난 영화하고 싶지 않다. 정말 힘들었다. 마지막 신은 자연스러운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며칠 굶으며 집중했다. 리얼리티는 살았지만 죽을 것 같았다.”

김남길은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중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고 나서 안보이면 대중들은 공백기라고 느끼지만, 김남길은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평상에도 트레이닝복을 자주 입는다. 편안하고 헐렁한 복장을 좋아한다. 지금도 공중목욕탕에 간다. 대중들과 섞여 있다. 하나의 캐릭터에 개구진 모습, 어두운 모습 등 다양하게 보여준다.

“배우는 자신이 가진 모습을 극대화해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연기하는 게 아닌 인물 그 자체다. 그렇게 표현하는 게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