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봉을 지웠다 살리는 안개가 걷히자 꽃세상이다. 산바람 사이로 끼어든 꽃향기가 싱그럽다. 녹음으로 짙푸른 이즈음 산릉의 주인은 들꽃이다. 푸른 산색에 기죽지 않는 사상자와 미나리아재비, 요강나물의 자태가 당당하고 탐스럽다. 기린초, 꿀풀, 당귀, 동자꽃, 둥근이질풀, 범꼬리, 붓꽃, 애기앉은부채, 하늘나리도 저마다 고운 자태를 뽐낼 준비에 한창이다.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들꽃이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곰배령(해발 1100m). 꽃잔치는 가을까지 이어진다.

점봉산(해발 1424m) 남쪽 능선에 자리한 곰배령은 강원도 인제군 귀둔리 곰배골 마을에서 진동리 설피밭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다. 기린면 진동리를 들머리로 삼아 오르는 이 고개는 ‘곰이 배를 보이고 누운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 봄부터 가을까지 모양과 빛깔이 제각각인 들꽃이 지천을 이뤄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고개 들머리인 진동리는 점봉산에서 단목령, 북암령, 조침령, 구룡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자락 밑에 터를 잡은 오지마을. 대간을 넘나드는 바람이 거세 비와 안개가 잦고 설피밭이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로 눈도 많이 내린다.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한 점봉산 일대는 천연원시림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생태계의 보고다. 1987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다 22년 만인 2009년 7월에 개방됐다. 보호수종이 많다 보니 국유림관리소에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했고,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비정규 등산로로 묶어놨다. 출입이 제한되고 접근이 불편해 외지인의 발길도 뜸하다. 그 덕에 원시림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생태감시원 양병진씨(41)는 “1000m가 넘는 산릉까지 등반로가 원시림에 뒤덮인 곳은 국내에서 이곳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곰배령은 진동리 설피마을에서 강선마을을 거쳐 오르는 길이 유일하다. 점봉산 산림생태관리소에서 곰배령까지는 5㎞. 왕복 4시간쯤 걸린다. 관리소에서 강선마을까지는 널찍하고 유순한 숲길이다. 산책하듯 30분쯤 오르면 산골마을 강선리다. 이 곳부터 본격적인 산행이다. 진동계곡을 끼고 가는 이 길은 고갯마루에 오르기 직전만 가파를 뿐 전체적으로 완만하다.

길은 내내 숲 그늘이 짙게 드리워 어둑하다. 원시림 아래는 들꽃과 들풀이 군락을 이루고, 시원한 물줄기를 토해내는 계곡도 줄곧 따라붙는다. 강선마을 못 미처 군락을 이룬 조릿대가 자주색 꽃을 내밀고 있다. 5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우는 조릿대는 꽃이 지면 모조리 죽는다. 상록양치식물인 속새도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속새는 눈 속에서도 푸른 때깔을 잃지 않아 겨울에는 들짐승의 먹이가 된다.

키 큰 잣나무 숲을 지나면 강선마을. 여기서부터 곰배령 정상까지는 조붓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물소리는 잦아지고 산새소리만 요란하다. 마을을 조금 지나자 밑동만 남은 거대한 주목이 반긴다. 그 옆으로 ‘Z’자를 옆으로 세워놓은 것 같은 음나무가 눈길을 끈다.

활엽수가 많은 숲은 토심이 깊다. 풀도 나무도 잘 자란다. 녹음 우거진 이 땅에 한계령풀, 금강초롱, 모데미풀, 진동족도리풀, 구실바위취, 털중나리, 노루뉘, 애기앉은부채, 나도개감채, 우산나물졸방제비꽃, 벌깨덩굴, 광대수염, 감자난초, 물양지꽃, 삿갓나물, 눈개승마, 까치박달, 분비나무, 거제수나무, 찰피나무, 난티나무, 가래나무, 백당나무, 서어나무, 머슬나무, 다릅나무, 가시오갈피, 팥배나무 등이 뿌리박고 산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들의 이름을 읊조리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활엽수 아래는 고사리과 식물인 관중이 뒤덮고 있어 원시림의 운치를 더해준다.

양병진씨는 “서어나무는 극상림의 마지막 단계 식물”이라며 “이 나무가 죽고 나면 키 작은 나무들이 빛을 보게 되는 순환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숲은 여전히 하늘을 가리고 있다. 턱 밑까지 숨이 차오를 무렵 하늘이 터진다. 곰배령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반갑다. 점봉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2.5㎞쯤 떨어진 곰배령은 오래 전 인위적으로 형성된 초원.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는 들꽃이 지천이다.

정상에 깔아놓은 나무데크를 따라 가면 헬기장 지나 산림대장군·산림여장군 앞에서 길이 끊긴다. 점봉산으로 넘어가는 대간 길목은 출입금지다. 이즈음 곰배령의 주인은 순백의 흰꽃이 탐스러운 사상자와 노란 때깔이 눈부신 미나리아재비, 검은 빛이 고혹스러운 요강나물이다. 은방울꽃, 털이풀, 초롱꽃도 곧 꽃망울을 터뜨릴 태세다. 곰배령의 평원이 온통 들꽃으로 치장하는 때는 8월부터다.

나무데크에 걸터 앉아 구슬땀을 식힌다. 곰배령 옆으로 작은 점봉산(1295m)과 호랑이코빼기(1219m)가 능선으로 이어진 모양이 아름답다. 반대편 우뚝 솟은 가칠봉(1240m)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멀리 구름이 걸터앉은 설악산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인제에는 ‘천상의 화원’과 함께 ‘천상의 늪’도 있다. 인제군 서화면과 양구군 동면·해안면에 걸쳐 있는 대암산(해발 1304m) 용늪이 그것. 해발 1280m에 형성된 남한 유일의 고층습원이다. 용늪(작은 용늪·큰 용늪)은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1년 중 170일 이상 안개에 휩싸이고 5개월 이상 영하에 머무는 용늪은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73년 천연기념물 246호로 지정된데 이어 1989년 생태계보전지역, 1999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고 1997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국제습지조약(람사조약)의 습지보호지역으로 등록됐다.

죽은 생물이 그대로 쌓인 이탄층(泥炭層)이 180㎝에 이른다. 맨 밑바닥 층은 무려 4500년 전에 만들어졌단다. 멸종위기 2급 식물인 기생꽃과 끈끈이주걱, 삿갓사초, 금강초롱, 비로용담, 동자꽃 등을 볼 수 있다. 삵과 참매, 황조롱이도 이곳 식구다.

늪지가 맨땅으로 변해가는 육화(陸化)로 인해 태곳적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지만 군락을 이룬 사초 틈새로 기생꽃, 금강초롱, 개통발, 비로용담, 가는오이풀, 끈끈이주걱 등 희귀 식물이 여전히 예쁜 얼굴을 내밀고 있다.

■ 여행정보

■찾아가는 길:서울에서 양평·홍천을 지나 철정검문소에서 우회전해 451번 지방도를 타고 인제 상남까지 간 후 31번 국도에서 현리교 건너 우회전해 418번 지방도를 타고 방동(진동)쪽으로 들어가면 진동리다. 호젓한 드라이브를 원한다면 인제읍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가다 진방삼거리에서 418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가는 것도 괜찮다.

■주변 볼거리:방동약수는 곰배령 가는 길목에 놓인 약수터다. 탄산, 망간 등을 함유해 위장병 등에 도움을 준다는 약수는 3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이외에 백담사, 12선녀탕, 내린천, 아침가리계곡, 대승폭포, 만해마을, 장수대, 하늘벽 등

■맛집:피아시식당(033-462-1277)은 매운탕이 유명하고, 진동막국수(033-463-7342)는 막국수가 맛있다. 이외에 고향집(두부전문점, 033-461-7391), 용바위식당(033-462-4080), 백담순두부(033-462-9395) 등이 있다.

■레포츠:내린천 래프팅(033-460-2084), 리버버깅(033-463-8254). 내린천 짚트랙(033-462-0701), 서든어택(033-461-0141), 번지점프&슬링샷(033-461-5216)

■등반:곰배령은 점봉산산림생태관리소(033-463-8166)의 인터넷 예약(www.forest.go.kr)을 통해 오를 수 있다. 수~일요일까지 오전 9·10·11시에 각각 생태안내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용늪 탐방은 한국DMZ평화생명동산(033-463-5155)이나 용늪자연생태학교(사무장 이종렬 010-5378-1467)에서 예약을 받는다.

■숙박:진동리에는 펜션이 많다. 설피밭지수네(033-463-0411)는 사진기자 출신의 김철한씨가 운영하는 펜션으로 별채에 3개의 방을 민박으로 내준다. 이외에 새나드리(033-463-7790), 꽃님이네집(033-463-9508), 세쌍동이네(033-463-8431), 해오름(033-463-5754) 등이 있다.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방태산자연휴양림(033-463-8590), 용대산자연휴양림(033-462-5031), 하추산자연휴양림(033-461-0056), 미리내캠프(033-463-3311), 모험레포츠연수원(033-461-0033) 등도 이용해 볼만하다.

■문의:인제군청 문화관광과 (033)460-2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