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차가운 가을이었다.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방출’을 체감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한화 이글스의 30대 베테랑 선수들이 한꺼번에 유니폼을 벗은 지난해 11월, 최진행(36)도 17년 이글스 생활을 마무리했다. 현역 의지를 앞세우며 재취업을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17년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이었다. ‘선수’ 그리고 ‘한화’라는 마음 속 끈을 놓기까지 잠시 시간을 가졌다. 차가웠던 석 달을 지나 봄맞이를 준비하는 2월, 최진행은 이제 새 출발을 위해 발을 뗀다. 비로소 “나 은퇴한다”고 직접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최진행이 17년간의 선수 생활을 최종 정리했다. 이제는 리틀야구 지도자로 새 출발한다.

최진행은 8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에서 “사실 방출 통보 받았을 때 바로 은퇴하겠다고 생각했다. 한화에서 시작했으니 한화에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며 “그래도 한 달 정도는 마음을 추스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 뒤 뭘 하고 싶은지 생각했고 이제 방향을 잡아서 서산시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새로 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프로야구 선수의 은퇴 이후 진로는 최근 다양화되고 있다. 지도자를 택한 경우에는 주로 프로야구 혹은 초·중·고교 야구부 지도자로 향한다. 그러나 은퇴 직후 리틀야구단 감독을 맡는 경우는 최진행이 처음이다.

이미 충남 서산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서산시 리틀야구단에서 이송영 감독을 도와 아이들을 지도 중이다. 이송영 감독 역시 한화 선수 출신으로 최진행과는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최근 몇 년간 2군에 자주 있었던 최진행은 휴일이면 종종 선배가 있는 리틀야구단을 찾아 아이들을 만났다. 한화에서 방출된 이후에도 꾸준히 ‘비공식 코치’로 어린이들과 함께 해왔다. 그러다 기회가 생겼다. 이송영 감독이 새로 창단할 중학교 야구부로 옮기게 되자 감독직 공모에 지원했고 리틀야구연맹 이사회 승인까지 거쳐 최종 결정됐다. 최진행은 “나도 리틀야구 출신이라 여기 올 때마다 어릴 때 생각을 많이 했다. 지도자로서 가장 아래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기본기부터 가르치면서 나 역시 다시 공부하고 발전하고 싶다”고 리틀야구로 향한 이유를 밝혔다.

간단치 않은 준비 과정을 이미 거쳤다.아마추어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스포츠지도자자격증이 필요하다. 지난해 시험을 봤고 지난 1월초 합격 통지를 받았다. 몸으로 알고 익혀왔던 야구 규칙부터 머리로 새로 공부했다.

리틀야구단은 초등학교야구부와 많이 다르다. 취미반과 선수반 아이들이 함께 한다. 건강해지려고, 활발해지려고 야구를 시작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야말로 야구의 기초부터 가르치게 된다.

집에서 야구장까지 ‘픽업’도 감독의 몫이다. 최진행은 1종 이상 먼허를 소지해야 하는 선수단 셔틀 버스 운행을 위해 운전면허도 다시 땄다. 최진행은 “한 번 떨어지고 두번째에 붙었다. 수동트럭 운전이 생각보다 어렵더라”고 웃으며 “아이들은 자기 것이 없어 백지와 같다. 그래서 결과가 바로바로 드러나고 또 정말 순수하게 열심히 배우려 하는 모습이 예쁘다. 애들이라서 오래 못 간다는 게 단점이지만 그래서 자꾸 설명해주고 몸에 배도록 해야 하는 게 앞으로 내 일이구나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야구장에서 운동만 열심히 해왔던 최진행은 이제 야구장에서 끊임없이 박수치며 “얘들아~”를 수없이 외치고 있다.

최진행에게 인수인계 중인 이송영 감독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잘 나눈다. 아이들도 아직은 ‘감독님’보다는 ‘최진행 선수’로 보기 때문에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최진행은 ‘슈퍼스타’로 은퇴하지는 못했지만 한때 김태균과 함께 한화의 중심타선을 책임졌다. 통산 1104경기에서 타율 0.264 152홈런 551타점을 기록했다. 2010년에는 32홈런 92타점을 치며 한화의 새로운 거포로 뜨거운 기대를 받으며 한화의 암흑기를 지킨 주축 선수이기도 했다. 한화에서만 보낸 17년 세월을 단숨에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방출에서 이어진 은퇴이기에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고 축복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제2의 인생을 결정한 이제,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최진행은 세 가지 이름을 꺼냈다.

17년 동안 자신의 이름 앞에 붙었던 이름, 한화에 대한 진심부터 이야기했다. 최진행은 “17년 동안 한화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물론 마지막에는 아쉽고 서운한 면도 있었지만 팀이 나가야 할 방향이 워낙 확고했으니 수긍하고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얼른 잊으려 노력했고 인사 잘 드리고 나왔다”고 했다. 최진행은 “최근 몇 년 동안 정말 후회 없을 만큼 열심히 운동했지만 결국은 팬들에게 좋은 모습 보이며 은퇴하고 싶다는 다짐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하지만 한화에서만 뛰고 은퇴하게 된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리틀야구를 시작하며 공을 잡았을 때부터 지금 새 인생을 준비할 때까지도 말 없이 지켜봐준 가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최진행은 “언제나 야구 선수 아들을 바라보며 마음 고생 하신 어머니와 시골에서 TV로 손주 경기 보시면서 플레이 하나하나에 행복해하고 안타까워하셨던 할머니가 계셔서 언제나 힘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뜨겁게 기대를 꾸준히 만족시키지 못한 최진행은 ‘보살’인 한화 팬들에게 ‘애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동안 “은퇴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미뤄왔던 최진행은 이제 비로소 한화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용기를 냈다.

최진행은 “야구장에서 좋은 경기력으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 선수의 몫인데 그러지 못한 때가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좋아해주신 팬들, 질책해주신 팬들도 모두 정말 감사하는 마음 갖고 있다. 선수로서 한화에서 받았던 기회와 팬들로부터 받았던 응원을 언제나 꼭 기억하면서 살겠다”고 17년 한화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