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잿빛 어둠 속으로 꼬리를 감췄다. 낮게 드리워진 세상은 음흉한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힘없는 존재 같았다. 여자는 주춤거리다가 핸드폰에서 새어 나온 불빛으로 앞길을 조금씩 비추며 걸었다.
불 꺼진 공원 벤치에는 폐지를 줍던 노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여자가 벤치 앞을 지날 때였다. 노인은 움츠렸다가 한껏 뛰어오르는 개구리처럼 몸을 펼쳐 여자의 손을 낚아챘다. 여자가 휘청거렸다. 노인의 주름진 손등은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세월의 노쇠함이 켜켜이 박혀 있었다.
노인과 여자의 손이 하나의 덩어리로 합체되기 시작했다. 노인은 괴력을 분출했고 검게 타오르는 핏줄이 여자의 손등으로 번져갔다. 여자는 이를 악물며 노인의 손을 뿌리쳤다. 노인의 손이 석면 가루처럼 공중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손이 노인의 주름진 살갗처럼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손가락 마디는 살갗을 발라낸 뼈 모양을 그대로 드러냈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노인의 눈빛은 생명을 잃은 채 허공을 떠돌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라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눈만 간신히 뜬 채 천장을 바라봤다. 며칠째 같은 꿈을 꾸었고 그때마다 기력이 반쯤 나가 육체가 분리된 느낌이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경은 문이 열리자 깜짝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렀다. 세라의 눈두덩이는 깊숙이 패었고 땀에 흥건히 젖은 머리카락은 이마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캡, 캡틴이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해서…. 카레 했다고 점심 같이 먹자고 하는데요.”
세라는 힘없이 도경을 쳐다봤다.
“아, 점심…. 보다시피 제가 좀 꼴이 말이 아니어서요. 다… 음에….”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도경이 물었다.
“근데 어디 아파요?”
도경은 세라의 입술에 난 핏자국을 보았다. 세라는 도경을 쳐다보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사람이 물으면 말을 해요.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도경의 말에 세라는 떨리는 입술로 소리쳤다.
“아파요! 아프다고요. 그럼 당신이 도와줄 거예요?”
도경은 카페에 앉아 마른 수건으로 카메라 조리개만 계속 닦았다. 세라는 창밖을 쳐다봤다. 캡틴은 세라와 도경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카레 접시를 내밀었다.
세라가 말없이 물을 마셨다. 도경이 한숨을 쉬더니 수건을 내려놓았다.
“앱니까? 안 좋은 꿈 꿨다고 울어서 사람 놀래키고.”
도경이 한마디 했다. 캡틴은 도경에게 눈을 깜박였다.
“저,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세라는 도경의 말을 무시하고 캡틴에게 물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뭐 달라진 거 없어요?”
캡틴은 짙은 눈썹을 위로 치켜뜨고 세라를 빤히 쳐다봤다.
“달라진 거요? 그야 당연히 있죠.”
“네?”
세라는 당황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일어 실력은 수준급으로 향상됐고, 웬만한 라멘도 잘 만들고, 그리고….”
“그런 거 말고요.”
“그럼 뭐가 더 있어요?”
캡틴이 멋쩍어하자 도경이 끼어들었다.
“성격 탓인지 살도 빠진 것 같고, 무슨 자신감인지 한국 아니라고 노메이컵에, 매번 악몽이라도 꾸는지 눈은 퉁퉁 부어 있고, 어쩔 땐 좀비처럼 시장 골목을 걸어 다니고.”
세라는 할 말 잃은 표정을 지었다.
“뭐 대략 이 정도요.”
도경은 카메라 장비를 하나하나 입바람으로 불며 말했다. 세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계속 비가 내렸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세라는 라멘집 문에 기대어 도톤보리강을 바라보았다. 강물 위로 팅커벨이 날갯짓을 하듯 작은 빗방울들이 소리 없이 춤을 췄다. 유리문에 달라붙어 미끄러져 내려가는 빗방울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세라는 어릴 적 아버지와 피터팬 만화영화를 즐겨 봤었다. 아버지는 팅커벨에 빠져 있었고, 팅커벨 요정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별 부스러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고 세라가 저렇게 예쁘게 크면 좋겠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세라는 피터팬이 되고 싶었다.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을 때 세라는 아버지의 그 말 때문에 키가 안 컸다고 탓을 했다. 작은 몸집에다가 그 안에 마음의 크기도 작아서 아무도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고. 정신을 놓고 시장 골목을 걸어 다닌다는 도경의 말도 틀린 건 없었다. 여전히 마음의 크기는 그때와 달라지지 않아서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질 못했다.
세라는 서울에서 정임을 본 뒤로 가슴 속에 가라앉았던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건져냈다. 정임은 잘 지내고 있었고 자신이 빠진 그녀의 삶은 그런대로 좋아 보였다. 공항에서 마음을 짓눌렀던 정임의 불안한 눈빛이나 눈물은 두부를 달랑거리며 들고 가는 모습 속에 사라져 갔다.
시장통에는 한 손에 우산을 접은 채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천장에 달린 대게 모형을 조금씩 흔들었다. 다코야키를 사려는 손님들이 옆 가게의 출입문까지 길게 늘어섰다.
요시메상의 화장품매장은 주인이 없는 무인 점포 같았다. 세라는 그녀가 초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는 캡틴의 말을 듣고 화장품 매장을 지날 때마다 눈여겨 들여다봤다.
다양한 먹거리가 진열된 푸드 코너를 지나다가 수제 햄버거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손님들이 볼 수 있게 셰프가 커다란 팬에 열 개의 패티를 올려놓고 한꺼번에 뒤집는 진기한 재주를 펼쳤다. 박수가 터져 나왔고 누군가 최고라고 연거푸 외쳐댔다. 초록색 두건을 한 뒷모습이 보였다. 요시메였다. 그녀는 가게는 내팽개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요시메상.”
세라가 이름을 몇 차례 불렀지만, 요시메는 셰프의 현란한 손짓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세라는 사람들 속으로 더 들어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요시메가 뒤를 돌아봤다.
“니코리!”
세라와 눈이 마주치자 반색하며 구경꾼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가게는 어떡하고 여기 있어요. 누가 화장품 다 가져가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녀는 세라의 등을 토닥이며 무작정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세라가 화장품 진열대를 천천히 살피고 있을 때 요시메는 커튼을 쳐놓은 내실에서 떡꼬치가 담긴 접시를 들고나왔다.
“니코리, 이리 와서 먹어봐. 누가 오기 전에 어서 먹어.”
요시메는 의자를 내밀며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세라는 갈락토미세스라고 써 있는 갈색 호리병을 들고 형광등 불빛 아래서 흔들었다.
![[연재소설] 세라의 티키타카(23화)](http://images.khan.co.kr/article/2022/05/06/l_2022050602000352900068441.jpg)
“요시메상, 이거 직접 만드셨다고 했죠.”
“그럼, 내가 만든 거지. 누구도 못 가져가. 왜, 그년이 온대?”
“네? 누구요?”
“나쁜 년. 내가 싫다고 하는데도 자꾸 만들어 달라고 하잖아.”
요시메가 두 눈을 허공에 부라리는 동안 세라는 계속 갈색 호리병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테스트 좀 해봐도 돼요?”
“그거? 물론이지.”
세라는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손등에 덜어 골고루 펴 발랐다.
“이거 갈락토미세스 농축액인 거 맞죠?”
“그게 뭔데.”
“아, 가라구토미센스요.”
“그럼, 난 섞은 거 안 팔아. 내가 효모에서 추출한 건데.”
세라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이것도 줄까? 갖고 싶은 것들 말해봐. 여기 있는 것들 다 니코리 거야.”
세라는 니코리가 돼 요시메와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다. 요시메는 화장수 제조법에 관한 노하우를 전수하듯 세세하게 설명할 때도 있었다. 세라는 놓칠세라 핸드폰으로 메모를 했다. 요시메가 ‘그년이’ 하며 허공에 대고 욕을 해댔다. 세라가 요시메의 손등을 감싸자 그녀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세라에게 말했다.
“니코리, 아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널 지켜줄 거야.”
요시메가 눈으로 세라의 얼굴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니코리의 정체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연재소설] 세라의 티키타카(23화)](http://images.khan.co.kr/article/2022/05/06/l_2022050602000352900068442.jpg)
■에린은 누구?
본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