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LG 선수들에게는 기념일과 같은 날이 됐다. 지난 11월13일은 LG가 29년 만에 한국시리즈 정상에 선 날이다.

LG 관계자들이 그날 밤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상대 더그아웃의 KT 선수들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눈발 날리듯 아쉬움이 밀려왔던 KT 주장 박경수(39)도 장면 하나하나가 또렷하다.

박경수는 5일 공개된 스포츠경향 야구 영상 채널 ‘최강볼펜’과 인터뷰에서 시리즈 패자 위치에서 담아놨던 그 날 밤의 몇 장면을 돌아봤다.

그중 하나는 한국시리즈 결과에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던 4번타자 박병호의 움직임이었다. 한국시리즈 최종전이 끝나면 패장 인터뷰가 먼저 진행된다. 이강철 KT 감독이 방송과 신문 인터뷰를 차례로 하려면 20분은 족히 걸린다.

그 틈에 원정 라커룸에서 무거운 분위기로 선수 미팅이 이어졌다. 그런데 박병호가 누가 먼저 입을 떼기도 전에 앞으로 나오더니 “미안하다. 고참으로, 4번타자로 너무 못해서 고개를 들 수 없다”며 깊은 미안함을 표현했다. 박병호가 조금 더 마음을 전하려는 사이, 박경수가 나서 말렸다는 내용이었다. 박경수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원팀이다”이라며 ‘누구 때문에 졌다’는 얘기는 있을 수 없다며 라커룸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박경수가 가을야구를 치르며 다시 느낀 것은, 박병호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이다. 박경수는 “병호가 한국시리즈 이후 팬페스티벌에서도 같은 얘기를 했다. 그만큼 책임감이 강한 선수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고 말했다. 이날 박병호가 드러낸 책임감은 곧 내년 시즌 KT 행보를 기대하게 하는 초석이 될 것이란 기대를 할 만도 했다.

또 하나는, LG 우승이 확정된 뒤 오지환이 맞은편 더그아웃 KT 선배들을 찾아와 인사한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박경수와 오지환과 포옹하며 축하와 위로를 나눴다.

박경수는 “영상을 통해서라도 지환이에게 정말 고맙다고 표현하고 싶다”며 당시 상황을 부연했다. “29년만에 우승이다. 더구나 지환이는 LG 주장이다. 얼마나 좋았겠냐”며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을 것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과거 함께 뛰었던 선배들을 찾아와 챙기며 ‘고생하셨다’고 인사를 잊지 않았다. 오지환이란 선수가 바로 그런 친구”라고 말했다.

박경수는 LG에서 함께 하던 오지환의 신인 시절 룸메이트이기도 하다. 박경수 또한 후배를 따뜻하게 안아줬지만 그 장면은 그저 경기 뒤 승자와 패자가 주고받는 일상적인 행위로 남지 않았다.

박경수는 내년 시즌에도 선수로 뛴다. 이강철 감독의 제안에 내년에도 주장으로 선수들을 이끌기로 했다. 지난 한국시리즈 마지막날 풍경은 내년을 위한 새로운 동기가 되고도 있다. 박경수의 소망은 내년에도 한국시리즈 마지막날 무대에 서 있는 것이다. 당연히 승자의 자리에서다.

박경수는 “2021년에 우승을 했지만, 우승 한번 해보니 매년 하고 싶어진다. 한번 더 하고 싶다”며 “선수생활을 한 해 연장한 내년에 수원구장에서 홈팬들과 함께 축제를 즐길 시간을 꼭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