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천하다. 월·화요일 MBC ‘이산’과 SBS ‘왕과 나’, 수·목요일 MBC ‘태왕사신기’, 토·일요일 KBS1 ‘대조영’…. 금요일 하루만 건너뛰면 일주일 내내 사극의 ‘도도한’ 물결이 안방극장에 넘실거린다. 정사를 현미경으로 조명한 작품에서부터 퓨전사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사극이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지는 법이다. 사극 제작 현장의 이면엔 ‘기다림’에 지쳐버린 출연진의 한숨 소리가 넘쳐나고 있다. 특히 ‘이산’과 ‘왕과 나’의 경우 주연급 연기자들도 ‘쪽대본’을 들고 다니며 캐릭터를 잡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 사극 ‘쪽대본’이 ‘쪽’팔려

쪽대본은 드라마나 영화 따위를 촬영할 때, 당일에 촬영할 수 있는 분량 정도만 나온 대본을 뜻한다. 현재 ‘왕과 나’는 늦어도 월요일 오전에 나와야 할 대본이 월요일 늦은 시각 내지 화요일에 나와 제작진이 애를 태우고 있다. ‘이산’은 일요일 세트 촬영에 앞서 나와야 할 대본이 일요일 늦게 나오는 경우가 많아 출연진들이 천장만 쳐다봐야 하는 경우가 이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사극 촬영이 생방송처럼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이산’ 관계자는 “한두 주 전만 해도 ‘쪽대본’ 때문에 제작이 너무 힘들었다”고 인정하면서 “이번주부터는 대본도 수월하게 나오고 있어 안정기에 접어든 느낌”이라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산’의 경우 시대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쪽대본’으로 이어진 듯하다”고 ‘쪽대본’이 나온 상황을 설명했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3년 전부터 준비해온 ‘태왕사신기’ 역시 ‘쪽대본’에 의지한 바가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지난 11일, 경희궁에서 촬영 중이던 ‘왕과 나’의 일부 출연진들은 “아직 대본이 안 나와 연습해 볼 시간이 없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쪽대본이 문제인 이유는 사극의 흐름을 잡아가는 전체적인 구도에서 엇나갈 수 있고, 촬영 시간이 너무 촉박해 수정이나 의견 조율을 거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해 ‘대조영’의 정영철 총감독은 “‘대조영’의 경우 최소 8회 이상의 분량을 앞서 가기에 큰 문제는 없지만, 예전 ‘먼동’을 찍을 때 쪽대본으로 고생을 했다”고 운을 뗀 후, “쪽대본은 촬영장을 초긴장 상태로 만든다. 스태프는 스태프대로, 출연진은 출연진대로 복사해 돌려진 쪽대본에 맞춰 찍기에 급급했다”고 밝혔다. 결국 드라마의 질은 다질 여유가 없고, 방송 시간에 맞추는 ‘스피드’만이 중요해진다는 얘기다.

# ‘쪽대본’은 역사 왜곡 빌미 제공

‘쪽대본’은 사극의 뼈대를 잡아줄 구성보다는 에피소드 위주로 급하게 꾸려지기에, 사극을 관통하는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방송 전문가들은 수십명 수백명이 움직여야 하는 사극의 경우, 최소한 방송 시점에서 2주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며 현 사극 제작 시스템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쪽대본’은 ‘급촬영’으로 이어지고 ‘막편집’에 연결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시트콤이나 일일극에서 벌어진다면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에 웃음보따리를 던져 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극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도 있다.

사극이 역사의 나열일 수는 없다는 일부의 지적이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굳이 역사를 비틀면서까지 극을 이끄는 것이 옳은가란 반론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쪽대본’은 제작환경에 대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게 만드는 단서다.

사극은 역사적 사실의 행간을 메우는 작업일 수 있다. 극의 에피소드는 사실과 사실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아교와 같다. 그 과정에서 선조가 남긴 삶의 교훈을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 속에 체화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씨줄과 날줄이 끊임없이 교차해야 한다. 초치기 ‘쪽대본’으론 이런 사극의 가치를 담아낼 수 없다. 반만년의 역사를 날치기로 때우지 않으려면 사극 제작에 좀더 세심한 배려가 필수다. 그것이 퓨전이란 수식어를 달더라도 사극은 사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