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류물건에 붙이는 ‘빨간딱지’가 대중문화계를 뒤흔들고 있다. 1996년 문화인들의 투쟁으로 쟁취한 사전심의제 폐지 이후, 심의의 망령이 최근 되살아나면서 업계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가 청소년보호를 명목으로 여기저기 ‘빨간딱지’(19세 이하 판매금지)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최근 1~2년 사이 가요, 영화, 게임 등의 콘텐츠의 사후심의를 통해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2006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도합 922곡이 ‘빨간딱지’의 대상이 된 가요계 등 업계 관계자들은 문화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5공화국식 제재’에 “해도 너무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가요엔… 닥쳐! - 웬만한 노래 ‘유해 가사’ 판정 불보듯

‘폭탄세례’.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의의 잇단 청소년 유해매체물 판정에 대해 팬들과 가요기획사의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하지만 마땅한 대응책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를 바라보는 가요계의 심정은 더욱 착잡하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최근 가수 비의 5집을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선정한 데 이어, 27일 동방신기의 4집 타이틀곡 ‘주문-미로틱’, 솔비의 1집 ‘두잇’, 다이내믹듀오의 4집 ‘트러스트 미’ 등의 노래를 대거 유해매체물 명단에 포함시켰다.

　비, 동방신기, 솔비의 노래는 각각 ‘선정적인 표현’을 이유로, 다이내믹듀오는 ‘욕설 및 비속어 사용’ 등의 이유로 제재를 받았다. 27일 유해매체물로 결정된 국내 음반은 53종, 해외음반은 47종 등 모두 100종에 달했다.

　대다수의 기획사와 팬들은 이번 조치에 크게 반발하는 분위기다. 한 기획사는 “가뜩이나 힘든 가요계의 숨통을 끊어놓을 참이냐”는 격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가수 비 측은 “일단 음반 판매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치에 응했지만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판정”이라고 반발했다. 동방신기의 팬들 역시 소속사로 마땅한 대응을 촉구하는 메일과 전화를 잇따라 보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렇다할 구제 방법은 없다. 해당 기획사나 유통업자들은 유해매체물로 선정된 음반에 대해 오는 4일부터 무조건적으로 청소년들에게 노출되지 않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음반의 경우 따로 포장을 하고 ‘19세 미만 판매불가’라는 빨간 스티커를 부착해야 하며, 음원의 경우에는 청소년들에게 다운로드 및 스트리밍에 대한 접근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 방송에서도 오후 10시 이후에나 방영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작사는 물론 유통사, 판매사, 방송사까지 모두 과징금 등 불이익이 뒤따른다.

　지난해 이같은 일을 당했던 베이비복스리브 측은 “청소년보호위원회의 판정은 가수 쪽에는 손도 한번 못쓰게 만드는
위력적인 것”이라면서 “판정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 측도 어쩔 수 없이 유해매체물 명단에 오른 이름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고백했다.

　2006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유해매체물로 선정된 노래는 국내외 곡을 합쳐 무려 922곡. 그동안 ‘빨간줄’을 그은 가수의 명단에는 조PD, 김진표, 에픽하이, 베이비복스리브, MC몽, 손호영, 엔젤, 노라조, 서인영, 아이비, 렉시, 천상지희, 라이머, 미나, 드렁큰타이거, 허니패밀리, 부가킹즈, 휘성, 배치기, 마이티마우스, 엄정화, 베일, 바나나걸, 신해철, 훌라당 등이 총망라된다. 해외 아티스트들의 면면은 더욱 화려하다.

　청소년보호위원회에 대해 국내 가요제작사들의 불만은 한결같다. KBS, MBC, SBS 등 방송 3사의 전문 심사위원들의 심의를 통과했던 노래의 경우에도 가차없이 제재가 잇따랐다는 점에서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는 지적이다. 또한 이미 관련 음반과 음원을 구매했던 청소년들도 “도대체 뭘 들으라는 거냐”면서 반발하고 있다.

- 영화엔… 잘라! - 19세 이하 청소년 관람 ‘음주·흡연’ 불가

‘누구든지 아동청소년의 접근 및 이용이 허용되는 매체물을 통하여 음주 및 흡연 장면을 노출시켜서는 아니된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추진하고 있는 청소년보호법 개정안에 들어있는 항목이다. 따라서 청보법 개정안이 현안대로 통과되면 19세 이하 아동청소년이 볼 수 있는 국내외 영화에 음주·흡연 장면을 넣을 수 없다. 음주·흡연 장면이 들어 있는 영화는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게 된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이 안을 수용, 등급판정을 내려야 한다.

　이 안에 따르면 청소년의 음주·흡연을 다룬, 청소년이 만든 영화를 청소년이 볼 수 없다. 18세 관람가 영화의 특정 장면을 패러디(parody) 오마주(hommage) 등의 형식으로 재창조한 모든 영상물도 ‘아동청소년 이용 제한 매체물’이 된다.

　영화인들이 26일 성명서를 내고 청보법 개정안 철회를 위해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의 고영재 사무총장은 “청보법 개정안은 술·담배 회사는 문화·예술·스포츠에 대해 후원할 수 없다고 돼 있다”면서 “담배·인삼 제품을 만드는 KT&G의 문화예술복합문화공간 ‘상상마당’이나 각 스포츠 구단이 없어져야 하는 말도 안되는 안”이라고 지적했다. 여한구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은 “영등위의 권한을 보건복지부 장관이 회수할 수 있다”면서 “산업적 차원의 이중 규제 정도가 아니라 모든 부서 위에 보건복지부가 존재한다는 헌법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주장했다.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은 “언론·출판·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헌법 정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라며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 게임엔… 막아! - 자정부터 6시까지 이용 제한 재추진

정부의 게임 규제도 강화되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청소년보호법을 개정, 청소년의 심야 게임 이용을 전면 제한하는 ‘셧다운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제도는 청소년 이용가 게임을 서비스하는 게임사가 자정부터 새벽 6시까지 서비스를 전면 중지하는 것으로 최근 문화부가 유사한 제도를 게임산업진흥법 개정으로 도입하려다가 과도한 규제라는 이유로 백지화된 바 있다. 그럼에도 보건복지부가 재추진하는 셧다운제도는 문화부보다 강력한 것이다. 문화부의 경우 학부모 개개인이 자신의 자녀가 이용하는 게임에 대한 제한을 업체에 요청한 경우에 한정되지만 보건복지부는 서비스 전체를 정지하는 것으로 기업의 사업권 및 사용자의 이용권을 크게 제약하는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는 또 등급을 받은 게임이라도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판단될 경우 보건복지부 산하 아동청소년보호위원회가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청소년유해매체물은 성인인증 등을 거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다.이에 대한 게임업계는 게임산업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며 크게 우려하고 있다. 한 문화계 관계자는 “대중문화의 심의는 소관부서(문화부)가 산업과의 균형 등을 고려해서 수위를 조절하는 게 맞다”면서 “보건복지부의 이같은 조치는 횡포”라고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