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볼 수 없는 사람이 기획한 출판물 <좌우파사전>(위즈덤하우스)이 2010년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아이러니다. 14명의 공동 집필자 중 유독 눈에 띄는 인사는 이건범씨(47)다. 그는 책을 읽지 못한다. 문맹이 아니라, 유전적 시각 장애로 책을 볼 수 없다. 여느 장애인들이 그렇듯 그의 삶은 세상의 편견과 싸워온 세월이다. 가기 편한 길보다 험로일지라도 가야할 길을 택한다는 게 그의 삶을 꿰뚫고 있는 일관된 버팀목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83학번)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의 대학 생활은 ‘운동’과 수감 생활로 점철됐다. 대학 시절 군부 독재에 저항의 몸부림으로 맞선 대가는 두 번의 투옥이었다.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기업 경영에 뛰어들었다. 말이 좋아 기업경영이었지만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무얼 할까 고민하다 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 특수상황을 감안해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4년부터 시작한 벤처기업 아리수미디어를 차린 것이다.

“아리수미디어는 교육용 콘텐츠를 생산하는 회사였습니다. 창업 여건이 안됐지만 결국 기업경영에 뛰어든 것은 운동권 전력자인 저를 받아 줄 회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전력이 창업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죠.”

교육열이 유난히 높은 사회 현실에서 회사는 잘 나갔다. 한 때 직원수가 120여명, 연매출 100억원 대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신장했다. ‘386 출신 CEO’로 제법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인터넷의 급성장 등으로 인해 교육용 콘텐츠 시장 환경이 급격히 바뀌면서 회사 사세는 급속히 시들었다. 결국 2006년초 수십억원의 부채를 안고 회사 문을 닫았다. 한마디로쫄딱 망했다. 장애등급 1급 판정으로 받은 보험금 1억여원까지를 포함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회사 청산에 쓸어넣었다.

훌훌 털고 나온 그는 비관에 빠지기않았다.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스스로의 파산에 무덤덤해졌다. 실망하고 좌절하기보다는 낙관하면서 재기를 꿈꿨다. 그와중에 만난 마라톤은 재기의 길을 찾는 빛이 됐다. 보통 사람은 그런 몸으로 달리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 터. 하지만 그는 희뿌옇게만 보이는 마라톤 코스를 특유의 악바리 정신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현재까지 6번 완주를 해냈다. 그 과정에서 인생의 굴곡을 넘으면 또 다른 성취감이 찾아온다는 사실도 자연스레 깨닫게 됐다.

기막힌 낙관주의가 기막힌 터닝포인트를 이끌다

이씨는 출판문화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겨 준 <좌우파사전>의 기획자이자 편집자이고 공동 집필자다. 이 책은 이씨를 포함한 공동 집필자들이 출판 당시의 사회 현안 20여가지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한 책이다. 한마디로 북치고 장구도 친 셈이다. 시각 장애가 오히려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낙관주의에 놀랄 따름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생활은 분명 불편합니다. 편의점 냉장고 안에서 콜라를 고를 때가 특히 그래요. 하루 하루 생활이 그런 불편함의 연속이지요. 출판 얘기로 돌아가서요, 글을 소리로 바꿔 들으면 좋은 점이 많아요. 음성으로 듣다보니 어색한 문장 연결, 논리적 비약 등이 잘 느껴집니다. ”

그는 1급 시각장애로 책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읽고 싶은 내용을 음성화 파일로 변화해 책을 ‘듣는다’. 책 만드는 작업을 이런 식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책을 출간할때와 비교하면 공력이 엄청나게 들 수 밖에 없다.

출판 일을 제안한 후배나 그 일을 해보겠다고 나선 이씨 역시 기막힌 낙관주의자가 아니면 쉽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새로운 선택에 토를 다는 사람보다 응원을 보태는 사람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대박이 나야할 텐데~’라는 말로 어깨를 토닥여주셨고, 아내는 장애를 통해 세상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갖게 될 것이라며 남편에 대한 믿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말이 없는 아버지는 신문에 대서특필된 수상 기사를 액자로 만들어 집에 걸어놓아 나를 놀래키기도 했지요.”

살아온 궤적을 통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삶을 돌리는 수레바퀴는 희망과 낙관이다. 그는 새로운 책의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소재는 그가 경험한 ‘징역생활’이다. 대학 4학년 때 4개월간 구속됐다. 1988년 9월 결혼했지만 신혼의 단 꿈은 불과 몇개월로 끝이 났다. 이후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결국 체포돼 2년4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런 인고의 세월을, 마치 살점을 도려내는 기분으로 책을 통해 반추하려 한다.

“오는 5월 출간할 예정으로 현재 표지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은 <내 청춘의 감옥>(상상너머)입니다. 엄혹한 시대였지만, 되돌아보면 징역 역시 사람사는 곳이었습니다. 몰래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고, 고스톱을 치기도 했구요. 감옥에서 불행과 절망을 느껴 잦아들기보다 또 다른 시작을 준비했던 모습을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엮어 보여 줄 생각입니다.”

세상의 채찍을 두려워하지 않는 낙관주의자의 도전에 미리 선을 그어놓고 금단의 구역을 설정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보인다. 이씨를 통해 세상을 보는 창은 시력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혜안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