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식상하고 뻔한 스토리, 심지어 막장드라마로 불리는 MBC TV 일일극 <그대없인 못살아>에서 그나마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등장 인물은 집안의 어머니 역할을 맡은 김해숙(57)이다.

그는 서른한살 때부터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김해숙은 한 인터뷰에서 ““세상 모든 엄마가 다 같을 수 없으니, 나는 이 세상 모든 엄마를 한 번씩 연기하고 눈을 감는 게 소원이다”고 말했다. 그는 <인생은 아름다워><조강지처 클럽><하얀 거짓말> <천일의 약속> 등의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차곡차곡 소원을 이뤄가며 ‘한국에서 가장 다양한 어머니 역할을 한 연기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는 동성애자인 아들의 사랑을 인정하는 어머니, <하얀 거짓말>에서는 소름끼치도록 냉철한 기업회장이지만 장애 아들 때문에 눈물흘리는 어머니였다. <조강지처클럽>에서는 뽀글뽀글 퍼머머리에 남편과 자식에게 욕을 서슴지 않는 주책스런 어머니, <천일의 약속>에서는 치매환자인 며느리를 인정하는 품위 있고 속깊은 어머니였다. 영화 <도둑들>에서도 이혼한 딸의 빚을 갚아주려고 다시 도둑들에 합류한 생계형 도둑 어머니 역할을 맡아 홍콩배우 런다화(任達華)와 로맨스 연기도 펼쳤다. 지난 20여년간 끊임없이 출연했는데도 김해숙에게 식상하지도, 겹치기 출연이란 비난을 받지 않는 이유는 그가 ‘어머니’란 존재를 이토록 다채롭게 연기해 대중들이 김해숙이란 연기자보다 극중 역할에 몰입한 덕분이다.

가족드라마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대없인 못살아>의 주인공은 고아 출신의 박은혜와 그의 남편 조연우, 그리고 박은혜를 키다리 아저씨처럼 돌보는 김호진이다. 불륜, 출생의 비밀 등의 가족 갈등만이 아니라 사사건건 엿들어도 전혀 발각되지 않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소유진 등의 인물에 스트레스받고 짜증이 나는데도 채널을 안 돌리는 이유를 ‘김해숙의 명품 연기’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김해숙은 이 드라마에서 젊은 시절, 남편이 바람 피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외간여자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키워야 하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30여년을 가게를 하며 가정을 지키고 3남 1녀를 잘 키운 엄마다. 부유하지도 않지만 손 내밀고 살지도 않는 중산층 가정, 아롱이다롱이 자식들 때문에 바람잘 날 없어도 자존심 지키며 고아인 며느리를 친딸처럼 거둔 따뜻한 엄마다. 온전하게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차 있는 그에게 믿었던 장남이 불륜을 저지르고 착한 며느리가 쫓겨날 신세가 되자 30여년간 장독 속에서 큰돌로 누른 듯 꾹꾹 참아왔던 억울함과 분노가 폭발해 치매 증세를 보인다. 쫓겨나듯 집을 떠나는 며느리에게 맨발로 뛰어나가 통장과 금반지를 쥐어주던 어머니의 자애로움이 서서히 무너져간다.

갑자기 익숙한 동네에서 길을 잃고, 친구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요리를 하다 불을 내고, 김치통에 빨래감을 넣어두는 등의 엉뚱한 행동을 한다. 치매가 서서히 발전하는 과정, 병원에서 치매 판정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싶은 그 상황을 김해숙은 30년 연기 경력으로 시청자들의 한숨을 자아내며 온몸으로 보여준다. 뇌세포를 찌르는 듯한 두통으로 아파하는 모습, 길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당혹감, 자신이 자꾸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치매 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과 공포감, 그리고 치매를 인정한 순간의 억울해하는 모습을 그는 이 드라마의 수준과 무관하게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그린다.

장남의 재혼날, 억지로 참석한 자리에서 겨우 견디느라 자꾸 식은땀을 닦으며 인내하다 공황상태에 빠진 표정을 짓는다. 불륜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내연녀가 당당하게 “안녕하세요. 오늘 저희 결혼식에 와주신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인사하는 순간, 마이크에서 퍼진 불쾌음에 귀를 틀어막던 그는 갑자기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 한다. 머리를 싸매고 통증을 느끼던 그녀가 순간 기묘한 배경음과 함께 마치 처음 보는 묘한 얼굴로 아들과 새며느리의 결혼식을 바라본다. 그전까지는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었던 아들의 여자를 향한 분노를 이제 본능만이 도사려 결혼식 단상에 선 아들과 내연녀를 향해 다가가 그의 머리칼을 잡고 흔든다. 아무런 이성도 남아있지 않은 순수한 증오만 남은 독기 어린 눈으로 아들의 내연녀에게 스르륵 다가서는 김해숙의 소름끼치는 눈빛... 섬뜩한 광기로 주변에서 말려도 내연녀의 머리채를 마구 쥐어흔들다 점차 기운이 빠져 혼이 나간듯 힘없이 쓰러지며 웨딩 케이크를 무너뜨리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그것이 연기임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탁월한 연기는 그저 30여년이란 세월이 남겨준 선물이 아니다. <도둑들>의 최동훈 감독은 김해숙이 호기심이 뛰어난 연기자라고 평한다. 50대 후반에 두 딸의 어머니란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일상의 익숙함으로 승부할 만도 하건만 그는 전형적 어머니상을 거부한다. 주변에, 주위사람에, 상황에 호기심이 많아 늘 연구를 하고 자신을 다듬고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걸걸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드라마 <천일의 약속>과 영화 <도둑들>의 출연을 결정하고는 아름다운 어머니, 어머니면서도 여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다이어트를 했다. 늘어진 볼이 올라가고 몸매의 선이 살아나면서 그는 어머니도 섹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덕분에 그는 영화 <도둑들>에서 상대역 런다화에게 “나 10년 동안 한번도 안 해봤어요”라는 대사를 하며 “중년의 얼굴로 소녀의 사랑을 연기했다”는 평을 들었다. 아픈 엄마 역할을 맡으면 실제로 몸 어딘가가 아프고, 수더분한 엄마 역할을 맡으면 실제로 식욕이 당겨 살이 찐다.

“이젠 엄마 연기의 달인, 국민 엄마란 과분한 찬사를 듣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위대한 연기는 바로 엄마 연기에요. 인류 역사에서 ‘엄마’라는 말이 지닌 영겁의 세월과 수많은 감정들, 그 어마어마한 함의들을 단순하게 연기로 표현한다는 게 이제는 두렵기까지 하답니다. 이 세상 모든 엄마를 표현하는 것이 내 연기의 목표이자 화두였는데, 언제부턴가 어렵고 책임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영화 못지않게 드라마도 사랑하는데, 앞으로도 안방극장에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엄마들의 모습을 연기하게 되겠죠. 배우는 뭣보다 연기로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의 어머니 연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가 동료나 후배들에게도 어머니의 모성애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촬영 현장에서 직접 된장찌개를 끓여주기도 하고, 어릴 때 엄마를 잃어 어머니에게 야단 맞는 상황의 표현이 어렵다는 최다니엘에게 “그럼 날 엄마로 생각하고 나만 믿고 따라와”라고 말해주는 그의 따뜻함 덕분에 다른 연기자들의 태도나 눈빛조차 어머니를 향한 그것이 된다. 덕분에 짜증나는 드라마에서도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모성애로 따스하게 빛난다.

[사진=MBC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