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김기동 포항 스틸러스 감독(49)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절로 묻어났다. 그는 올해 프로축구의 ‘킹 메이커’를 거부하면서 ‘현대가’ 형제인 울산과 전북을 모두 무너뜨리겠다는 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김 감독은 19일 기자와 통화에서 “올해 우승 경쟁은 이제 두 팀의 몫이 됐다”고 껄껄 웃었다.

김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포항은 정규라운드(22경기)를 마친 뒤 돌입한 파이널라운드(5경기)에서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강팀들만 만나는 파이널A(1~6위) 성적은 무려 3전 전승이었다. 그 상대에는 2위 전북(1-0 승)과 1위 울산(4-0 승)이 포함된 터. 요동치는 우승 판도에 환호한 일부 팬들은 ‘킹’기동이라는 별명까지 안겼다. 군팀인 상주 상무 김태완 감독이 올해 호평을 받은 지도력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다.

축구 전문가들은 김 감독이 보여준 성적보다 육성 능력에 높은 점수를 매긴다. 포항의 예산이 모기업 포스코의 경영 악화로 매년 줄어드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일이다. 지난해 1부리그 씀씀이에선 우승 후보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뒤에서 4번째였다. 올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현실 속에 성적을 낸 것은 젊은 신예들의 성장 덕분이다. 프로 3년차인 송민규(21)가 토종 선수로는 유이한 두 자릿수 득점(10골·5도움)으로 영플레이어상을 예약했고, 미드필더 이승모(22)는 든든한 살림꾼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감독은 “없으면 없는 대로 선수를 키우는 게 감독”이라면서 “선수가 없다고 하소연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더라. 주변에서 위로는 해주지만 책임을 지는 감독이라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게 난 육성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선수의 숨겨진 재능을 찾는 재주도 뛰어나다. 오른쪽 풀백인 권완규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중앙 수비수인 전민광의 포지션 변경을 통해 해결책을 찾았다. 상주에서 전방 공격수로 뛰던 강상우(7골·12도움)를 설득해 왼쪽 풀백을 맡기면서 어시스트왕을 노리는 위치로 이끈 것도 눈길을 끌었다. 김 감독은 “(강)상우는 팀 사정을 위해 희생해준 고마운 선수이고, (전)민광이는 남들이 못하는 포지션 변경에 성공할 때까지 노력해줬다. 민광이 덕에 챙긴 승리가 5경기는 된다”고 말했다.

김 감독이 너무 뛰어난 육성 능력을 발휘한 나머지 내년 주축 선수들을 대거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에 가깝다. 쓸 돈은 뻔한데 나갈 곳은 늘었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출전권이라는 목표와 개인 성적까지 이룬 선수들은 연봉 인상을 원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에 올해 계약이 만료되는 일류첸코(17골·5도움)와 팔로세비치(13골·6도움)는 높은 임금을 제시하면 붙잡기가 쉽지 않다. 김 감독이 “내년이 걱정이다. 선수를 외부에서 데려오지는 못해도 지켰으면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한숨을 내쉬는 이유다.

더군다나 김 감독 본인도 아직 재계약 제안을 받지 못했다. 포항에서 은퇴한 레전드로 그 누구보다 포항을 사랑하는 그이지만 앞으로 미래는 불투명하다. 김 감독은 “2년 전 갑자기 감독직을 맡으면서 계약했던 2년 6개월이 지나간다. 아직 별 다른 제안은 받지 못했다. 내년 준비를 서둘러야 하는데 고민이 깊어진다”고 전했다.